조승우(38)는 분명 비범한 배우다. 그가 펼치는 연기를 보고 있노라면 이따금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작품 안에서 그는 오롯이 그 캐릭터로서만 존재한다. 역할에 따라 말투와 눈빛, 심지어 주변을 감싸는 공기마저 달라지는 경지에 이르렀다고나 할까.
“조승우가 곧 장르”라는 찬사는 허투루 지어진 것이 아니다. 그가 내뿜는 존재감은 곧잘 작품 전체를 휘감아 버리곤 한다. 영화 ‘명당’에서도 그는 태풍의 눈과 같은 강렬함을 발산한다. 분명 고요하게 흐르는데 그 속에는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품고 있는 것이다.
극 중 조승우가 맡은 배역은 땅의 기운을 읽어내는 데 천부적 능력을 지닌 지관 박재상. 자신의 가족을 해한 장동 김씨(백윤식) 가문에 대한 복수심과 부패한 권력을 몰아내고자 하는 사명감에 차오른 그는 몰락한 왕족 흥선(지성)과 손을 잡는다.
지성 백윤식 김성균 유재명 이원근 등 쟁쟁한 배우들이 함께한 영화에서 조승우는 극의 전체적인 무게감을 조율하는 역할을 해낸다. 요동치는 감정을 좀처럼 폭발시키지 않으면서도 뜨겁게 끓어오르는 그 무언가를 눈빛만으로 내비친다.
혹자는 과하다 할지도 모를 찬사를 이렇게나 쏟아낸 건, 직접 전하지 못해서다. 조승우에게 이런 말들을 건네면 그는 낯간지러워 어쩔 줄 몰라 할 게 빤하니까. 최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조승우는 “칭찬을 들으면 되게 감사하면서도 되게 민망하다. 몸 둘 바를 모르겠어서 도망가고 싶을 정도”라고 손사래를 쳤다.
“스스로에 대한 평가에 박한 편”이라는 그는 연기 비결을 묻는 질문 따위는 단칼에 잘라내 버렸다. “그런 거 없습니다, 없어요.” 꾸며낸 겸손이 아니라 꾸밈없는 진심으로 느껴진다. 그의 화법은 늘 이런 식이다. 직설적이면서도 솔직하기 그지없다.
그 때문에 때로는 ‘까칠해 보인다’는 편견어린 시선을 받기도 한다.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저를 겪고 친분을 다진 분들은 아실 거예요. 저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웃음). 현장에서 장난도 많이 치고 잘 놀아요. 재미있는 거 좋아하고, 심심한 거 못 견디고….”
실제의 조승우에게선 화면 속이나 무대 위의 카리스마를 찾아보기 어렵다. 스타의식으로 벽을 쌓는 편이 아니다. 상대를 진솔하게 대한다는 느낌을 준다. 조곤조곤 느릿느릿한 말소리가 너무도 매력적인데, 이를 그대로 전하기 위해 그와의 대화는 문답식으로 싣는다.
-‘명당’ 출연을 결심한 이유부터 들려주겠나.
“감독님과의 인연 때문이었어요. 박희곤 감독님과 ‘퍼펙트 게임’(2011)를 함께했었는데, 그런 분이 갑자기 사극 시나리오를 주신 거예요. 처음 읽었을 때 클래식한 정통사극이라는 인상이 강했어요. 정적인데 힘이 있으면서 우아하다는 느낌이 들었죠. 그래서 하게 됐어요.”
-사극 연기가 현대극과 다른 지점이 있을까.
“연기는 다 어려운 것 같아요. 저는 사극을 많이 해봐서 특유의 외적인 불편함이나 어려움은 다 알고 있었죠. 근데 저는 시대극이나 사극이 더 재미있더라고요. 요즘 영화나 드라마 소재가 많이 고갈되고 정형화돼 가고 있는데, 과거 이야기를 다루다 보면 되게 흥미로워요. ‘이런 배경이 있었다고? 이게 실제 역사라고?’ 알아가는 과정이 새롭고 재밌어요.”
-사극은 드라마 ‘마의’(MBC·2012~2013) 이후 5년 만인데.
“그동안 의도적으로 안 한 건 아니고요. 안 들어와서 안 한 거예요. 더 좋은 작품들을 선택했던 거겠죠. 저는 그때그때 꽂히는 작품을 하니까.”
-작품을 고르는 기준이 확고한 편인가.
“네, 아주 확실하게 있습니다. 작품의 메시지가 분명하게 전달이 되어야만 하고요. 시대의 유행을 타는 작품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겉보기에 화려하기만 한 작품은 피하는 편이죠. 그 연장선상에서 얘기하자면, 배우를 하면서 ‘나는 왜 배우를 하고 있지? 뭐 때문에 하고 있지? 어떤 의미를 두고 배우 생활을 해야 하나’ 고민한 적이 있어요.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죠. 내 작품을 보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선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연기를 해야겠다.”
-‘명당’을 통해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무엇이었나.
“인간의 욕망은 얼마나 그릇된 결과를 가져오는가. 몇 백 년 전 이야기지만 현시대에 빗대어 봐도 분명 공감되는 부분이 있을 거라 생각해요. 사람은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중요한지 생각하며 살아야 하니까요. 영화에서는 그 욕망의 대상이 땅으로 그려지는데, 더 큰 부귀영화를 위해 무작정 달려드는 건 마치 불나방 같은 거죠. 결국 파국으로 치닫게 되니까요.”
-감정의 폭이 큰 흥선에 비해 박재상은 자칫 단조로워 보일 수도 있었는데, 연기를 하면서 중점을 둔 부분은.
“방점은 찍은 부분은 사실 없어요. 그렇게 연기를 접근하진 않고요. ‘그 신에서 이걸 할 거야’라는 생각은 안 해요. 계속 흐름을 타고 가는 거예요. 저는 연기할 때 제일 중요한 게 합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상대배우가 없으면 나도 없는 거고, 좋은 상대배우와 좋은 호흡을 맞추는 게 가장 중요하죠. 물론 어려운 역할이긴 했어요. 잘 안 보일 수도 있었고요. 과해서도 약해서도 안 됐죠. 조화롭고도 균형감 있게 축을 받쳐줘야 했는데, 그 에너지를 어떻게 유지할지는 감독님과 많이 상의했어요.”
-이번 작품에서 역시 조승우 배우의 연기에 대해선 칭찬일색이다.
“물론 기분 좋아요. 칭찬 받고 안 좋은 사람이 어디 있어요,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데(웃음). 근데 다음 행보에 대한 부담감이 너무 커져요. 상대적인 거거든요. ‘말아톤’(2005) 이후 ‘도마뱀’(2006)을 했을 때도, ‘말아톤’ 캐릭터는 세고 강했는데 ‘도마뱀’에선 내추럴한 연기를 하니까 관객들 성에 안 차는 부분이 있었을 거예요. 최근에는 ‘비밀의 숲’(tvN) ‘라이프’(JTBC)가 있었죠. ‘명당에서는 왜 저렇게 부각되지 않는 역할을 했지?’ 그러실 수 있어요. 하지만 저는 배우이고, 어떤 역이든 마음에 들고 끌리면 해요. 굳이 튀려는 생각은 없어요. 나를 필요로 하고, 내가 원하는 작품이면 얼마든지 할 용의가 있죠. 그런 면에서 ‘명당’은 제게 충분히 의미가 있는 작품이었어요.”
-매 작품마다 놀라울 정도로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주곤 한다. 연기 비결은 없다고 했지만, 캐릭터에 몰입하는 자신만의 방법은 있을 것 같은데.
“불변의 방법이 있죠. 대본밖에 없어요. 대본을 보면서 계속해서 상상해고요, 감독님과 얘기하며 생각을 공유하죠. 캐릭터는 혼자 만드는 게 아니니까요. 그렇게 40% 정도 준비된 상태로 촬영을 시작해요. 나머지 40%는 현장에서 상대배우들이 만들어주는 거죠. 어, 이 대답 괜찮은 것 같은데? 마음에 들었어(웃음).”
-좋은 상대배우를 만나는 일이 매우 중요할 것 같다. 특히 절친 구용식 역의 유재명과는 ‘비밀의 숲’ ‘라이프’에 이어 세 번째 호흡을 맞추지 않았나.
“재명이 형이랑은 이제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통하는 사이가 됐죠. 대본 없이 그냥 내버려둬도 둘이서 30분 이상 연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 상대배우를 만난다는 건 굉장한 축복이에요. 저는 그 복이 넘쳤죠. 항상 상대배우 복이 좋았어요.”
-얼마 전 ‘라이프’를 끝냈는데, 소감이 남다를 것 같다. ‘비밀의 숲’에 이어 두 번째로 출연한 이수연 작가 작품이기도 했고.
“많은 분들이 ‘비밀의 숲’과 비교하시는데 둘은 전혀 다른 작품인 것 같아요. 굵은 줄기, 시스템에 대해 다뤘다는 것 정도만 같죠. ‘라이프’는 그동안 다루지 않았던 대형병원 내부의 모습들을 다뤘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어요. 의료기관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로서 처음 시도해본 거죠. 물론 아쉬움을 표하는 분들이 계시다는 건 알아요. 작가님이 전작과는 다른 설정들을 시도해보셨는데, 팬들은 그런 부분을 아쉬워하셨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이 작품은 분명 충분한 의미를 지녔다고 생각해요.”
-오는 11월부터는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 무대에 선다. 2004년 초연부터 네 시즌이나 출연한 작품인데, 남다른 애착이 있는 모양이다.
“처음 제안을 받고 세 번이나 도망쳤던 작품이에요. 스물다섯 살 때였어요. 대본을 보고 음악도 들어보다가 ‘이걸 내가 어떻게 하냐. 난 못 한다’고 거절했죠. 계속 도망갔는데 세 번을 쫓아오시더라고요. 결국 미친 척 하고 ‘한번 해보자’ 했죠. 결과는, 제 예상과 달리 많은 분들에게 인정받은 작품이 됐잖아요. 뮤지컬 배우로서 조승우라는 이름을 알리게 해줬죠. 저에겐 모든 걸 한꺼번에 보따리로 안겨준 작품이에요. 자신감과 두려움이 동시에 몰려왔어요. 관객들의 열광적인 모습을 보며 희열과 보람, 감동을 느끼기도 했고요.”
“20대 중반에 시작한 이 작품을 마흔을 바라보는 지금 다시 해보니 예전의 느낌과 많이 다르더라고요. 제가 성장해가면서 작품을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한편으론 걱정도 돼요. ‘이 작품을 15년 동안 했는데 또 해도 되나, 민폐 아닌가, 관객들이 지겨워하지 않을까, 후배들이 욕심 많은 선배라고 하지 않을까.’ 근데 아직까지도 못 보신 관객들이 많다고 하더라고요. ‘꼭 보고 싶다’는 그 분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내가 이걸 놓으면 안 되겠구나’ 싶었어요.”
-언급했듯, 어느덧 마흔을 바라보고 있다. 배우로서 나이 든다는 것에 대한 생각은 어떠한가.
“우리나라에만 빠른 생일이라는 게 있잖아요. 제가 그 빠른 생일이라, 친구들이 다 마흔이에요. 그 아이들을 지켜보면서 마흔이 된다는 것에 대해선 무뎌졌어요. 근데 별 거 없을 거 같은데요? 나이 드는 거, 재미있을 거 같아요. 경험이 많이 쌓이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달라지겠죠. 연륜이 쌓여가는 게 좋은 거 같아요. 배우는 하나의 인물을 만들어가야 하는데, 거기에 제 경험을 빗대어 생각의 깊이를 더해서 새로운 인물을 창조해낼 수 있는 이점이 생기는 거죠.”
-최근 몇 년간 쉬지 않고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어떤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던 건지.
“좀 쉴까요? 지겨워요 저(웃음)? 중간 중간 나름 많이 쉬긴 했어요. ‘명당’ 촬영이 1월에 끝났고, 3월 넘어 ‘라이프’ 촬영을 시작해 7월 말에 끝마쳤죠. 그러고선 쭉 쉬었어요.”
-쉴 때는 무얼 하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이구아나처럼 집에 가만히 있어요. 집에서 강아지 고양이랑 놀고, 운동하고, 야구 보고…. 참, 요즘은 ‘쇼미더머니’(Mnet) 봐요(웃음). 그러고 지내요.”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