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영이 사라졌다. 지난 7월 22일 인천 상대로 경기에 나선 뒤 두 달 넘게 FC서울의 라인업에서 제외됐다. 벤치에도 앉지 못한 채 아예 2군으로 쫓겨난 처지라 충격은 더하다. 이을용 감독 대행에게 완전히 신뢰를 잃었다는 뜻이다. 팀 내에서 손꼽히는 고액 연봉자인 만큼 그를 바라보는 팬들의 시선도 달갑지 않다. 한 때 박지성을 이어 한국축구를 이끌어갈 차세대 재목으로 꼽혔던 스타의 안타까운 황혼기다. 3년 재계약을 한 후 R리그에 정착시키는 서울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 역시 적잖다.
“참 황당하다. 이런 걸 보고 사람들은 믿을 수밖에요. 우리 팬 여러분들도 믿겠어요. 저에게 물어보셨다면 더 좋았을 것을. 이런 걸로 거짓말들 하지 맙시다. 올해 단 하루도 부상 때문에 쉰 적이 없습니다. 그것이 사실입니다.”
박주영이 지난 21일 자신의 SNS에 한 기사를 태그하며 게시한 글이다. 그가 태그한 기사를 살펴보면 박주영이 고질적인 무릎 부상과 잔부상으로 몸 상태가 100%가 아니라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뿐만 아니라 재활에 집중했음에도 회복속도가 더뎌 복귀 시점도 잡지 못한 상황이라며 R리그에 나서고 있지만 몸 상태가 완벽하지 않은 것이 서울이 박주영을 기용할 수 없는 이유라며 분석했다.
박주영 본인 스스로 경기에 나서지 못하는 상황이 답답할 법하다. 그의 SNS글에는 그러한 심정과 함께 주축 공격수로 팀이 어려운 시기에 보탬이 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담겨져 있다.
현재 서울은 연일 하락세를 기록하고 있다. 지난해 후반기부터 끝모를 부진에 시달리며 구단 창단 첫 하위 스플릿은 물론 승강제 도입 후 최저 순위라는 위기에 처했다. 6경기 연속 무승이라는 안갯속을 헤매다 26일 최하위 인천을 상대로도 1대 1 무승부를 기록하며 분위기 반전을 하지 못했다. 리그 순위는 9위(승점34)로 강등까지 걱정해야하는 최악의 상황이다. 그럼에도 이을용 감독 대행이 박주영 카드를 꺼내들지 않는다는 것은 그가 현시점에서 완전히 전력 외로 분류됐다는 것을 뜻한다.
박주영의 말대로라면 그는 100%의 건강한 몸 상태임에도 최악의 부진을 겪었다. 박주영은 2018 K리그1에서 15경기에 나섰으나 단 한 골을 기록하는데 그쳤다. 평균 45분 이상을 뛰며 30대 중반의 나이에 나쁘지 않은 기회를 받았으나 도움 하나 없이 한 골이 전부였다. 90분당 0.13 득점이다.
◆ 변화 필요한 서울, 이을용에게 박주영은 도박?
서울은 변화가 필요한 시점임엔 분명하다. 최근 7경기 동안 단 3골을 기록하는데 그쳤다. 공격에서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시즌 전체를 두고 볼 때 팀 최저득점 수준이다. 단조로운 공격패턴이 상대에게 완벽히 읽혔다는 뜻이다.
비록 선수생활 끝자락 나이에 접어들었으나 박주영의 장점은 분명하다. 제공권과 동료 공격수들과의 연계다. 최전방과 2선에서 플레이 메이킹을 하며 골게터와 좌우 측면공격수에게 찬스메이킹 역할을 동시에 해낼 수 있는 선수다. 무엇보다 타고난 센스와 킥 능력은 그의 최고 장점이다. 이번 시즌 K리그에서 90분당 유효슈팅이 0.79에 그치는 결정력이나 순발력 저하는 아쉽지만 제공권에서 만큼은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공중볼 경합에서 90분당 4.89차례 우위를 점했다. 적어도 빈공 속에 한번쯤은 고민 해볼 법하다.
단조로운 공격에 변화를 꾀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이을용 대행이 박주영을 외면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서울이 대구FC에게 충격의 0대 2 패배를 당하기 전 이을용 대행은 현재 자신이 생각하는 그의 몸 상태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본인도 안다. 좋았을 때에 비해서는 (기량이) 좀 떨어졌다. 폭발력이 예전 같지 않다. 몸을 올리는 중이다. 계속 R리그를 통해 컨디션을 점검하고 있다. 몸을 올리기 위해 훈련량을 늘리기도 했다. 지금은 컨디션 좋은 선수를 무조건 써야 하는 상황이다. 이름이 있는 선수라고 해서 몸이 안 좋은데 쓰고 그럴 여유가 없다.”
자신의 몸 상태가 좋다고 주장하던 박주영의 말과 대조되는 냉정한 평가다. 전성기에서 내려오며 더 이상 다른 동료 공격수들과 비교했을 때 경쟁력이 떨어진단 뜻이다. 이을용 대행이 훈련을 통해 지켜본 박주영의 몸 상태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다는 의미기도 하다. 그것이 박주영을 R리그로 백의종군을 보낸 이유일테다.
박주영의 R리그 활약은 나쁘지 않다. 지난 11일 수원과의 R리그 경기에 출전해 풀타임을 소화한데 이어 17일 부천전에선 선발 출전해 멀티골을 터뜨렸다. 비록 R리그와 K리그1의 수준 격차가 있긴 하나 그의 말대로 신체적으로 문제가 없음을 증명했다.
이젠 1군 합류 시기가 문제다. 꾸준히 R리그에 출전하며 몸 상태를 끌어올리고 있다는 것이 향후 반전을 기대해볼 만한 유일한 부분이다. 박주영이 언제 다시 이을용 대행의 부름을 받아 1군 경기에 나설지는 미지수다. 다만 이을용 대행은 지난 22일 경남전에 앞서 가진 인터뷰에서 박주영 기용에 대해 작은 힌트를 줬다.
“언젠가는 쓸 것이다. 써야 하는 선수다. 하지만 조심스럽다. 이번에 기용하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자칫 부진할 경우 선수도 큰 상처를 입을 수 있다. 좋은 위치와 상황에서 기회를 주고 싶어 코칭스태프도 면밀히 관찰하고 기다리는 중이다. 선수도 팬들도 모두 그 시점을 기다려줘야 한다.”
오히려 팀이 위기이기에 박주영을 기용하는 것이 부담스럽단 뜻이 내포돼 있다. 박주영이란 카드를 도박으로 여기고 있다는 어조가 강하다. 이을용 대행의 말로 추론해봤을 때 팀이 최악의 부진을 겪고 있는 현재 상황에선 박주영은 당분간 R리그에서만 머물 가능성이 높다.
◆ 후회 뿐인 아스날 행, 릴로 갔었다면…
선수들은 대개 한번쯤은 인생을 좌우할 수 있는 큰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박주영에겐 2011년 여름이 그랬다. 아마 선수 본인으로서도 인생에서 다시 돌아가고픈 순간을 꼽는다면 이 시기를 택할 것이다. 스포츠에서 가정이란 무의미하지만 그때 박주영의 선택엔 후회와 아쉬움만 가득하다.
당시 박주영은 프랑스 리그앙의 릴OSC 입단을 확정지은 상황에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아스날이 손을 뻗어왔다. 아르센 벵거 감독은 공격수 마루아네 챠마크 등이 아프리카 네이션컵에 출전함에 따라 백업 공격수를 원했고 그의 눈에 띄었던 것이 박주영 이었다.
이때 박주영은 릴과 이적료 300만 유로(약 47억원), 매월 19만 유로(3억원)을 받는 조건으로 3년 계약을 끝마쳤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아스날이란 거대클럽에 도전하기 위해 릴의 메디컬 테스트를 받지 않고 영국으로 떠났다.
계약을 끝마친 상황에서 갑작스런 타구단 이적은 축구계에서도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당시 미셸 세이두 릴 회장으로부터 “인간적으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맹비난까지 들으며 도의적인 책임까지 저버리고 아스날로 향했지만 그것은 불운의 시작에 불과했다.
벵거 감독은 그에게 전혀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이적 첫 시즌 프리미어리그 1경기와 유럽 챔피언스리그 2경기 등에 출전하는데 그쳤다. 1년 만에 등번호 9번을 루카스 포돌스키에게 뺏기고 30번으로 밀리는 수모까지 당했다. 아스날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 후 스페인 셀타 데 비고와 당시 잉글랜드 챔피언쉽(2부리그)에 있던 왓포드로 임대를 전전하다 사우디아라비아 리그를 거친 후 K리그로 돌아왔다.
아스날에 입단했을 당시 박주영의 나이는 한창 선수로서 전성기를 구가할 26세였다. 현재 손흥민의 나이다. 아스날의 제안을 거절하고 릴로 향했다면 박주영의 선수 인생은 지금쯤 조금은 달라져 있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시기에 경기에 나서지 못하며 그의 선수인생은 쭉 내리막을 걷고 말았다. 거대 구단의 이름값에 현혹돼 섣불리 무모한 이적을 한 뚜렷한 선례가 됐다.
박주영은 화려했던 고등리그 시절과 달리 어린 나이에 대표팀 자리를 꿰찬 후 유럽 도전과 임대를 전전하며 다사다난한 선수 생활을 보냈다. 그런 그에게 행운의 여신이 마지막 한번쯤은 그의 손을 들어주길 바래서일까. 개인적으로 박주영이 K리그에서만큼은 모두가 기대했던 길을 걸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박주영에게 잔인한 도전은 선수생활 끝자락에서까지 찾아왔다. 프로 데뷔 이전까지 항상 꽃길만 걸어왔던 그로선 2군의 자리는 자존심이 구겨질만 하다. 팬들의 잇따른 비판에 심리적 압박감과 부담을 또한 느끼고 있을 것이다. 팀이 위급한 상황에서 박주영의 무리한 플레이와 부진이 나온다면 그를 향한 비난은 더욱 거세질 수 있다. 하지만 이을용 대행이 “한 팀은 특정 선수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프로는 경쟁이다”고 강조했던 것처럼 그러한 무게를 견뎌내라고 쥐어준 것이 프로라는 명패다.
아직도 박주영이 K리그 그라운드로 돌아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많은 팬들이 있다. 이을용 대행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부진을 이겨낸 그가 그라운드에서 다시 한번 기쁨의 세레머니를 펼칠 수 있길 기대해본다.
송태화의 인저리타임
인저리타임. 전광판의 시계는 아직 멈추지 않았습니다. 송태화 기자가 함성소리에 스며드는 이야기를 전하는 스포츠 연재입니다.
송태화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