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 속 저를 마주한 소감이요? 데뷔했을 때 느낌이었어요. TV에 딱 처음 나왔을 때요. 아직 갈 길이 멀구나 싶었죠(웃음). 이제 한 발짝 뗐다는 말이 와 닿더라고요.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던 것 같아요.”
이 얘기를 하는 이혜리(24)의 표정에서는 진솔함이 묻어났다. 약간의 조심스러움도 엿보였다. 걸그룹 걸스데이 멤버이자 7년차 배우. 산전수전 다 겪었을 그이련만 ‘첫 영화’가 주는 설렘이란 것은 적잖이 신선하고도 강렬했던 모양이다.
이혜리는 ‘물괴’로 스크린 데뷔를 하게 됐다. 조선시대 도성에 출몰할 괴이한 짐승 물괴(物怪)를 막기 위한 사투를 그린 크리처(CG로 구현한 괴생명체) 사극 영화. 극 중 그는 물괴를 추적하는 수색대 대장 윤겸(김명민)의 딸이자 빼어난 궁술과 의술을 지닌 명 역을 소화했다.
최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이혜리는 “시사회 전 선배님들이 ‘영화를 처음 볼 때 너밖에 안 보일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게 무슨 얘기인지 알겠더라.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나밖에 안 보였다. 신기하기도 했고, 뿌듯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창피하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영화를 보고난 첫 느낌은 ‘다시 찍고 싶다’였어요. ‘지금 찍으면 저것보다 잘할 것 같은데’ 아쉬움이 컸죠. 첫술에 배부를 수 없겠지만, 저는 첫술에 배부르길 바랐나 봐요(웃음). 저 스스로에게는 아쉬움이 크게 느껴졌어요. 애정 어린 마음으로 봐주시면 정말 감사할 것 같아요.”
2012년 ‘맛있는 인생’(SBS)으로 연기에 입문한 이혜리는 꾸준히 드라마에 출연했다. ‘응답하라 1988’(tvN·2015·이하 ‘응팔’)로 전 국민적 사랑을 받았고, 이후 ‘딴따라’(SBS·2016) ‘투깝스’(MBC·2017)를 선보였다. “영화를 하고 싶었지만, 영화만 하고 싶은 건 아니에요. 좋은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은 마음이 커요.”
‘물괴’에 끌린 이유는 ‘신선함’ 때문이었다. 사극과 크리처물이 결합된 새로운 장르인 데다 나름의 탄탄한 스토리까지 갖춰 흥미를 자아냈다. 이혜리는 “시나리오를 읽을 때 자연스럽게 상상을 하게 되더라. 내가 상상했던 걸 표현해보고 싶었다”며 “평소 SF장르를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도전해보고 싶었다”고 했다.
사극 말투부터 액션까지 준비할 것이 많았다. 모든 게 첫 도전이었다. “사극이라는 장르 자체가 가장 어렵고 막막했어요. 하지만 극복해내고 싶었죠. (퓨전 사극이다 보니) 말투는 정통사극과 현대극의 중간 지점을 찾아 연습했어요. 활을 쏠 때 손이 떨리지 않도록 (운동해서) 힘도 많이 길렀고요(웃음).”
캐릭터를 완전히 이해하고 체화해가는 과정도 필요했다. 이혜리는 “명이는 당차고 씩씩하고 목소리도 크다. 그런 면에선 나와 비슷하지 않나 싶다. 자신이 어딘가에 필요한 사람이길 바라는 점 또한 그렇다”고 웃었다. 이어 “후반부로 갈수록 다양해지는 감정선을 어떻게 잡아 나갈지 고민이 많았다”고 털어놨다.
캐릭터 표현을 위해서라면 망가짐도 불사했다. “제가 그린 명은 꾸미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는 아이였어요. 처음부터 그렇게 잡고 시작하니 부담이 없었죠. 얼굴이 검은 칠을 했는데, 제 피부가 원래 까만 편이라 티가 별로 안 났어요(웃음). 예쁘게 하고 나오는 게 오히려 더 어색하지 않았을까요?”
연기자로서의 마음가짐은 갈수록 깊어진다. 4~5년 전만 해도 무작정 자신감이 넘쳤다는 그다. 가수도 배우도 MC도 전부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았고,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나와 어울리지 않게” 신중함이 생겼다. 무슨 일을 할 때 좀 더 신중해지고 책임감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이제는 제가 무얼 하면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세요. 지켜봐주시고, 신경을 써주시고, 응원도 해주시죠. 그 숫자가 정말 많이 늘었잖아요. 거기서 오는 책임감이 아닐까 싶어요. 예전에는 그저 ‘많이들 봐주셨으면 좋겠다’는 정도였다면 지금은 ‘더 좋은 모습으로 보답해드리고 싶다’는 마음인 거죠.”
연기에 대한 욕심이 깊어진 계기는 ‘응팔’이었다. 이혜리는 “그렇게 큰 관심과 사랑을 받아본 작품은 처음이지 않았나. 드라마를 좋아해주신 분들의 평을 들으며 ‘내가 연기를 통해 이렇게 다양한 감상을 전할 수 있구나’ 뿌듯했다. 이런 마음으로라면 더 좋은 연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졌다”고 얘기했다.
“‘응팔’은 모든 배우들이 만나고 싶어 할 작품인데, 제게 기회가 주어졌다는 게 너무 행복하죠. 이 작품으로 저는 ‘함께한다’는 의미를 배웠어요. 자그마한 역할들이 모여 이런 대단한 작품을 만들어냈다는 게 감사하더라고요. 제가 그런 마음을 느끼는 것만큼 시청자들도 똑같이 느끼셔서 참 신기했고요.”
늘 칭찬만 받을 순 없다. 때로는 매서운 질타를 받기도 한다. 사람인지라 상처받는 건 어쩔 수 없으나, 최대한 무던히 받아들이고 있다. “상처를 안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요. 친구들끼리도 ‘야, 누가 네 욕했대’ 그러면 마음 아프잖아요(웃음). 저는 그런 느낌을 매일매일 받으면서 살아요.”
하지만 “난 대중을 상대로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니 대중의 평가에 귀 기울이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는 게 이혜리의 말이다. 그는 “아무리 내가 잘했다고 생각해도 대중이 아니라고 하면 난 잘못한 것이다. 반대로 내가 아니었다고 해도 대중이 ‘혜리 최고야, 짱이야’ 해주시면 그게 맞는 것”이라고 말했다.
“여러 말씀들을 다 새기고 싶어요. 저에 대한 평가를 긍정적으로 바꾸는 것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걸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고요. 상처도 받지만, 그만큼 사랑도 많이 받잖아요(웃음).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