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동맹 중심으로 견고한 기조가 구축됐던 한반도 안보 전략에 남북 공조라는 새로운 변수가 등장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9월 평양공동선언으로 남북 간의 종전을 선언하고, 한반도 비핵화에 있어서도 공동보조를 맞추기로 합의했기 때문이다.
1950년 6·25전쟁 이후 우리 사회는 반공 이데올로기가 최우선 이념으로 자리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세계사적으로도 한·미·일 대 북·중·러의 냉전구도가 한반도에 공고히 내려앉았다. 이런 상황에서 남북 공조가 새롭게 등장하면서 ‘패러다임 시프트’가 한반도 안보 지형을 강타하게 된 것이다.
문 대통령이 “5000년을 함께 살고 70년을 흩어져 살았다”고 밝혔던 그 민족은 과연 70년 전으로 돌아가 다시 공조체제를 구축하고 냉전 구도 속에서 교량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 숱했던 남북 합의와 비핵화 협상처럼 다시 ‘없던 일’로 전락하는 사태를 되풀이할 것인가. 문재인정부의 정책 역량은 물론 우리 사회 전반의 역량을 시험하는 구도가 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연내 서울 답방은 그 가늠자로 여겨질 것이다.
한·미 동맹+민족 공조, 패러다임 시프트
평양선언으로 인해 한반도에는 한·미 동맹의 한 축과 남북 간 민족공조의 한 축이 들어서게 됐다. 여기에 북·중 혈맹의 구도가 여전히 남아있다. 좁은 한반도에 운집한 남·북·미·중+알파(일·러)의 복잡한 구도에 또 하나의 방정식이 추가된 셈이다.
평양선언의 부속합의서인 남북 군사분야 합의서는 남북 간의 무력충돌을 원천 봉쇄하는 로드맵을 담고 있다. 전문가들은 송영무 국방부장관과 노광철 북한 인민무력상이 서명하고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임석한 군사 합의서가 종전협정의 효과를 지닐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적어도 문재인정부 임기 내에는 남북 간 무력충돌은 불가능하다는 취지다.
조한범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원래 휴전협정, 종전협정은 현장의 군 지휘관들이 하는 전술적 조치”라며 “김일성(북한인민군 최고사령관)도, 펑더화이(중공인민지원군 사령관)도, 마크 웨인 클라크 대장(UN군 총사령관)도 모두 사령관 자격으로 1953년 휴전협정을 맺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군사 합의서에 국방부 장관이 서명하고 양쪽 정상이 임석한 것은 법적 효력을 가진 종전선언, 사실상의 종전협정이다. 이제 남은 것은 북·미 종전선언 뿐”이라고 강조했다.
정치적 선언인 종전선언에 더해 법적 효력까지 갖추게 돼 어느 정도는 되돌릴 수 없는, 불가역적 협정의 틀을 갖췄다는 취지다. 이렇게 되면 남측을 전진기지로 한 북·미 간 전쟁이 가능한지, 또 북·미 전쟁 시 남측의 참전이 가능한 지 등 몇 가지 논쟁이 만들어지게 된다. 최소한 우리 정부는 이에 동참할 의사가 없음을 명확히 밝힌 것이다. 지난해 말부터 심각하게 미국 내부에서 검토했던 대북 선제타격설에 보내는 경고 메시지이기도 하다.
남북 종전선언은 한·미 동맹 내부의 변곡점이 될 가능성도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7년 10·4 남북 정상 공동선언에서 명기한 이후로 종전선언은 남북이 약속한 비핵화의 입구였다. 하지만 미국은 그동안 종전선언에 대한 반대 입장을 꾸준히 피력했다. 비교적 북한 문제에 적극적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미 행정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역사적인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에도 불구하고 실무 협상에 들어서면 벌어지는 북·미 간 갈등은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북한은 관영언론을 총동원해 종전선언 여론전을 펼쳤지만 미국은 요지부동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다소 전향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미 관료사회와 의회, 내부 강경파들의 반대 목소리는 잦아들지 몰랐다. 이런 상황에서 남북 주도의 종전선언이 채택된 것이다.
이 여파가 한·미 동맹과 한반도 비핵화에 어떤 영향을 끼칠 지는 예단하기 어렵다. 문 대통령은 23일 미국으로 떠나 24일(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 정상의 종전선언을 거듭 설득할 예정이다. 당장 미국에서 나오는 반응은 비교적 양호하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평양선언 이후 미 국무부가 ‘북·미 관계의 근본적 변화’를 언급한 것은 매우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종전선언의 최대 변수로 여겨졌던 중국은 한발 물러서는 모습을 보였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이달 초 러시아 동방경제포럼에 참석해 “(한반도 문제의) 당사국은 북한, 한국, 미국”이라며 “중국 속담에 방울을 건 사람이 풀어야한다는 말이 있다. 그들은 함께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남·북·미·중 4자의 복잡한 방정식에서 중국 변수가 제외될 가능성이 높다. 종전선언이 오롯이 한·미 동맹과 민족 공조의 문제로 한정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문재인정부의 종전선언 드라이브를 미국이 받아들일지 여부만 남았단 의미다.
평가는 엇갈린다
전문가들은 판단이 다소 엇갈린다. 홍민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북·미 협상이 풀리는 국면으로 가는 게 큰 의미”라며 “남북에서 끝나지 않고 북·미 가 비핵화 실마리를 찾아가는 것과 연동이 되고 있다”고 했다. 이어 “한·미·일 대 북·중·러 구도의 변화는 연초부터 있었다”며 “70년 넘게 이어졌던 전통적인 북방 삼각체계와 남방 삼각체계 구도가, 연초부터 이어진 남·북·미 삼각채널로 균열이 왔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만약 종전선언을 하게 된다면 남·북·미 결속이 전체 동북아 지형 변화의 핵심적인 축이 된다”고 내다봤다.
‘한·미 동맹+민족 공조’를 통한 패러다임 시프트다. 밑바탕에는 북한의 위상변화도 있다. 홍 위원은 “중·러의 대변자 역할이었던 북한 역시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전략적 위상이 매우 높아지게 된다”고 덧붙였다. 조 위원도 “새로운 북·미 관계라는 획기적인 조치를 바탕으로 북핵의 완전 폐기, 평화의 시대를 만들자는 뜻으로 종전선언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라며 “남북이 함께 북·미의 동시행동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 안의 지렛대를 먼저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한다”고 말했다.
남성욱 고려대 통일외교학부 교수는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그는 “북한과 미국 간 비핵화 진전이 있어야 패러다임 시프트가 되지, 그게 없으면 사상누각이 된다”고 말했다. 이어 “남북 간의 종전선언이 중요한 게 아니라 북·미 간 실질적 종전선언이 중요하다”며 “가장 핵심적인 전제조건이 아직 해결 없이 미정상태”라고 평가했다. 남 교수는 “비핵화가 되면 자연스럽게 군사적인 위협을 감축시키고 후속 조치가 자연스럽게 따르게 된다”며 “그런데 지금 비핵화는 다 가정법 문장이고, 국제사회가 받아들일만한 조치도 얘기하지 않아 다 유보적인 것이다. 오히려 안보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우리 안보지형에 대한 얘기를 덧붙였다. 그는 “북한이 핵실험만 6번을 하고, 대량살상무기를 가지고 있는데 (평양선언에) 이렇게 의미를 부여해버리면 사태가 어려워질 때 어떻게 할 것이냐는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 국책연구기관 고위 관계자는 “91년 남북기본합의서 내용을 27년만에 실행할 수 있는 조치를 만든 것에 의미가 있다”며 “다만 그런 측면을 과대해석하는 건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비핵화 부분은 속도가 안나고 있고, 이번 합의에도 실질적 비핵화는 들어가 있지 않다”며 “적어도 안보 분야에선 모든 가능성을 체크하고 신뢰를 형성하면서 탄탄한 시멘트 작업을 하는게 중요하다. 속도만 빼는 게 중요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문성묵 한국국가전략연구원 통일전략센터장은 “정말 고생했고, 의미 있는 합의를 했고 이걸 잘 지키면 충돌을 방지하고 신뢰를 구축하는데 기여를 할 것”이라며 “하지만 북한이 신뢰할 만한 대상이냐의 문제가 여전히 잔존하고 있다. 상당한 우려들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 평가했다.
북한에 대한 불신을 넘을 수 있을까
진보 진영의 환호와 달리 보수 진영의 우려 목소리는 북한에 대한 불신, 미국의 태도 변화 여부에 대한 불안감에서 비롯된 부분이 많다.
① 북한이 과연 약속한 조치를 잘 실행할 것인가?
② 북한은 남측을 향한 군사도발을 하지 않을 것인가?
③ 북한은 종전선언만 챙기고 비핵화 조치는 차일피일 미루다 판을 깨려하진 않는가?
④ 압도적 군사력을 가진 미국이 북한에게 상응조치를 해줄 필요가 있는가?
⑤ 대북 지렛대인 무력 옵션을 미국이 먼저 포기할 이유가 있는가?
⑥ 북한은 왜 ‘항복’하지 않고 동등한 대우를 미국에 요구하고 있는가?
⑦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우세한 군사력을 먼저 내려놓고 저자세 외교를 하고 있는가?
청와대 역시 국제사회의 대북 불신을 불식시키는 게 가장 중요한 임무임을 파악하고 있다. 청와대 관계자는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끊임없이 북·미 양쪽에서 각각의 입장과 진의를 전달하는 것”이라며 “그리고 우리가 전달한 입장들이 점차 실현되면서 북·미가 상호 신뢰를 가지게 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우리는 박근혜정부 친중 노선의 실패를 되풀이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근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분기가 태동하고 있다.
강준구 기자 eye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