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화가 이기영, 먹꽃을 지우자 드러난 매끈한 벼루의 미학

입력 2018-09-21 16:47 수정 2018-09-22 12:03
지필묵. 동양화에서 그림을 그리기 위해 필요한 3요소인 종이와 붓, 먹을 일컫는다. 여기에 꼭 딸리는 것이 있다. 벼루다. 벼루에 먹을 가는 행위는 동양화를 완성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필수적인 절차였다. 오랜 시간이 걸렸기에 그 과정 자체는 명상과 자기 성찰의 행위에 비유되기도 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기성품 먹물을 사용하면서 벼루는 동양화를 생각할 때 점차 익혀져가는 존재가 됐다.
이기영 작 'Carved 595'. 이화익갤러리 제공

동양화가인 이기영(54) 이화여대 교수의 작업은 그 차갑고 단단한, 그러면서 매끄러운 벼루에 대한 근원적 기억을 소환한다. 그가 그린 화폭의 바탕은 매끈하고 단단하다. 한지 특유의 스며듦의 물성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면서 분방한 터치들이 살아있어 마치 깊고 검은 벼루 위에 먹을 가는 행위들이 연상이 된다. ‘먹꽃 화가’로 불렸던 그가 새롭게 변신을 시도하며 내놓은 신작은 이렇듯 지우는 행위를 통해 벼루의 본성에 다가가고 있는 듯 했다.
이기영 작, 'Carved 597'. 이화익갤러리 제공

일명 ‘지우기 시리즈' 신작을 들고 서울 종로구 율곡로 이화익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갖고 있는 작가를 최근 만났다. 그는 한지에 그림을 그리는 동양화 작가이지만, 거꾸로 한지 고유의 느낌을 없애는 방식을 창안함으로써 화단에 이름을 알렸다. 25년 전의 일이다. 화판에 한지를 씌운 뒤 그 위에 소석회를 펴서 바른다. 어느 정도 두께가 쌓이면 그 위에 그림을 그리는데 마치 벽화 같은 효과를 낸다. 작가는 그렇게 수묵으로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하는 방식으로 꽃과 숲을 추상화해 그렸다. 그렇게 해서 그의 브랜드가 된 먹꽃이 이번 전시에는 사라졌다. 신작 20여점은 검은 색 혹은 회색의 표면에 지운 행위의 흔적들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변신은 이렇게 시작됐다. 4년 전 어느 날, 20년 넘게 이런 작업을 해오던 작가는 이 모든 게 지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너리즘에 빠진 게 아닌가, 자신에 대한 일종이 환멸 같은 감정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밤새 제가 그렸던 작업들을 마구마구 지워버렸어요.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서 캔버스를 보니 어, 훨씬 그림이 괜찮아진 거 있지요. 지우면서 생긴 선이 의도하면서 그린 선보다 훨씬 살아 있으면서 저를 더 잘 드러내는 것 같았어요.”

홧김에 한 지운 행위는 그렇게 새로운 길이 됐다. 신작 중 절반은 과거에 그린 그림을 지워내고 완성한 것들이다. 지운 화폭에는 날카로운 칼로 선을 그어 다양한 색을 입혔다. ‘Carved 620’ ‘Carved 597’ 등 작품 제목에 나오는 숫자는 깎아낸 선들의 최장 길이다. 지우는 방법은 다양했다. 맨손으로도, 장갑을 끼고도, 스폰지나 사포 같은 도구를 이용해 지우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나타난 흔적, 터치들은 때로는 일렁거렸을, 때로는 격정적인 상태였을 작가의 여러 심리상태를 오롯이 드러낸다. 제 형태는 사라졌지만, 마음을 비우듯 지운 행위의 흔적은 남은 매끄러운 표면들. 그 무심의 리듬들로 인해 그는 홀가분해보였다. 전시는 29일까지.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