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소액 분할 인출, 일선 판사 서명 증빙 필요” 비자금 조성 ‘깨알 지시’한 행정처

입력 2018-09-06 16:32 수정 2018-09-06 16:34
법원행정처가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관련 문건 중 비공개됐던 문건들을 공개하기로 했다. 사진은 지난 7월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모습.

법원행정처가 각급 법원 공보관실 예산을 빼돌려 3억5000만원의 불법 비자금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각급 법원에 “예산을 현금으로 소액 분할 인출하라” “지출 결의서를 공보관이 필수 기재·서명해야 한다”는 등의 ‘깨알 지시’를 내린 것으로 6일 확인됐다. 그간 대법원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거듭 기각했던 법원도 이 같은 명백한 불법 지시 정황이 드러나자 결국 영장을 발부했다.

서울중앙지검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수사단(단장 한동훈 3차장검사)은 이날 불법 비자금 조성 혐의로 서울 서초구 대법원 건물에 있는 법원행정처 예산담당관실과 재무담당관실을 전격 압수수색해 관련 자료를 확보했다. 검찰이 대법원 건물에서 행정처 문건을 압수하는 동시에 사무실 수색까지 벌인 것은 처음이다.

앞서 행정처는 2015년 상고법원 추진 과정에서 고위 법관들에게 격려금·대외활동비가 필요할 것이라는 판단에 기획재정부, 국회에 3억5000만원 가량의 ‘각급법원공보관실운영비’ 예산을 2014년 새로 청구했다. 각급 법원 공보관실은 허위증빙서류를 작성해 2015년 배정된 이 예산을 전액 현금으로 인출한 뒤 행정처에 인편으로 ‘배달’했다.

박병대 당시 행정처장(대법관)은 그해 3월 양승태 당시 대법원장 주재로 전남 여수엠블호텔에서 열린 전국법원장 회의에서 각급 법원장들에게 많게는 2400만원에서 적게는 1100만원의 비자금을 직접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회의에는 박 처장을 포함해 양 대법원장, 전국 고등법원장, 특허법원장, 지방법원장, 가정법원장, 법원도서관장 등이 있었다고 한다.

법원이 영장을 발부한 것은 비자금 조성 과정에서 드러난 불법성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행정처는 비자금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예산을 청구할 때 일선 공보판사가 직접 서명한 증빙서류를 제출해야 한다” “의심을 피하기 위해 (예산을) 소액 분할 인출해야 한다” “예산을 (행정처에서) 인편으로 수령한 다음 (행정처) 공보법관이 수령했다는 서명 날인을 하라” “지출결의서를 일선 공보판사가 직접 기재해야 한다”는 등의 지시를 내렸다. 이는 검찰이 행정처의 임의제출 등을 통해 확보한 문건에 적시돼있다. 허위증빙서류를 작성하는 방법과 외부 기관의 의심을 피하는 방법 등을 구체적으로 전달한 것이어서 범죄 의도가 명백하다고 검찰은 판단하고 있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소송과 관련한 박근혜 정부와 양승태 사법부의 '재판거래' 의혹과 관련해 곽병훈 전 청와대 법무비서관이 6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하고 있다. 2018.09.06.


다만 비자금 조성을 주도한 박 처장과 강형주 당시 행정처 차장, 임종헌 당시 행정처 기획조정실장 등 전직 법관들의 사무실과 주거지 등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은 끝내 기각됐다. 이언학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자료가 남아있을 개연성이 희박하다”는 사유를 댔다. 검찰은 “비자금 사건 관련 압수수색영장은 일반직 사무실에 한정해 발부됐다”며 “이 사건 의사결정주체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은 모두 기각됐다”고 밝히며 강력 반발했다.

한편 검찰은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 손해배상 소송 개입 의혹 등에 연루된 이민걸 전 행정처 기획조정실장(현 서울고법 부장판사)의 서울고법 사무실도 이날 함께 압수수색했다. 강제징용 소송 개입 의혹에 함께 연루된 곽병훈 전 청와대 법무비서관도 소환조사했다.

문동성 기자 theMo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