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한기영] 지방분권, 사회적 합의가 우선이다

입력 2018-09-02 17:10 수정 2018-09-02 17:19

지방 분권이 가지고 있는 매력을 가장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은 1932년 미 연방 대법원 판사 브렌다이즈의 “민주주의 실험실로서의 연방제”가 아닐까 한다. 미 연방제도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장점은 강력한 자치권한을 바탕으로 지역 고유의 아젠다를 접목한 정책의 수립 및 시행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1930년대 미 연방 정부는 대공황으로 인한 사회·경제적 문제 해소를 위해 중앙 주도 방식의 대규모 뉴딜정책을 추진했다. 대공황으로 무너진 미국 경제는 약 6년 동안 추진된 뉴딜 정책에 의하여 회생하게 되었다. 뉴딜정책은 아직까지도 미국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정책으로 기억되고 있으며, 오늘날 대부분의 복지정책도 뉴딜 정책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을 정도이다.
이와 같은 성공스토리의 핵심의 이면에는 하나의 아이러니가 숨겨져 있다. 뉴딜 정책이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성공 열쇠는 연방이 사회재건정책을 주도해서가 아니라 전문화된 지방분권제도가 정책 추진의 굳건한 토대를 마련해왔기 때문이다. 사실 뉴딜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대다수의 세부적인 정책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주정부 차원에서 시행되고 있었다. 당시 연방 정부가 뉴딜 정책 추진 시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것은 각 주의 정책 중 가장 성공적인 정책 사례들을 분석하고 취합하는 일이었다.
예를 들면 고령자와 장애인의 보호를 위해 추진했던 사회보장법은 시민전쟁 직후 생겨난 고아와 미망인 보호를 위한 펜실베니아 주 이외 4개 주의 시민전쟁 연금법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또한 노동자들의 열악한 작업환경 개선을 위해 시행했던 “노동관계위원회”는 이미 뉴욕 주에서 시행하고 있었던 정책이다. 다시 말해 뉴딜 정책의 성공은 혁신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정책개발을 유도할 수 있는 강력한 지방분권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한 각종 사회복지정책 기획에 있어서도 전문화된 의회를 보유한 각각의 주 정부 정책 사례를 벤치마킹했음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각 주정부의 혁신적인 정책을 해당 주 내에서 뿐만 아니라 멀리 연방 수준까지도 확산시키는 성공모델을 이룩했다는 점에서 지방 분권의 가치와 의의는 한 단계 더 격상한다.
문재인 정부가 지향하는 ‘연방제 수준의 지방분권’은 아마도 이러한 효과를 기대하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최근 행정안전부에서 발표한 지방분권(안)의 방향성은 지방분권의 핵심적 가치에서 다소 벗어난 모습을 보인다. 물론 지방의회의 전문성 강화와 관련된 지방자치법의 개정 여부가 성공적인 지방분권 실현을 위한 선결과제이기는 하다. 그러나 자칫하면 지엽적으로 보일 수 있는 이러한 대안만으로는 지방분권으로 정책에 온전한 생명력을 불어 넣겠다는 청사진이 빛바래지기 쉽다. 지방의회의 활성화가 가져올 수 있는 장점들은 무엇인가? 선결되어야 할 과제는 무엇인가? 이를 위한 사회적 합의는 어떻게 이끌어낼 것인가? 즉, 보다 더 근원적이고 포괄적인 시각을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지방분권을 통한 의회의 전문화가 가져오는 장점은 매우 명확하다. 일련의 연구들을 보면 지방의회의 전문성 강화는 지역구 주민들과 보다 많은 접촉기회를 제공함을 골자로 한다. 이는 곧 주민의 의견이 의정활동에 반영될 확률과 정책성과에 대한 체감을 제고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전문화된 의회의 의사결정과정은 당파성보다는 소신에 의한 표결 가능성을 높여주며 의원 1인당 법안 발의 수도 월등히 증가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지방정부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수직적이기 보다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해 지방정부에 대한 견제와 협업이 보다 용이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무엇보다도 전문화된 의회는 앞선 뉴딜 정책의 예처럼 보다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정책을 수립할 가능성의 모태가 된다. 실생활과 밀접하게 맞닿아 설계된 정책은 다른 지방자치단체로 확산될 가능성 역시 높게 나타난다.
지금부터라도 국민의 삶을 바탕으로 지방분권의 지향점을 세세하게 밑그림 그리는 작업이 필요하다. 정책 효과를 중심으로 구체적인 민생 영역을 각 지방자치단체의 상황에 맞게 쪼개고 나누면서도, 지방분권의 의의와 가치에 대해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것이 우선되어야만 한다.

한기영 서울특별시의회 의원·정치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