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선완 교수의 좌충우돌 아랍주유기⑮ 영욕의 땅, 이집트 25시

입력 2018-08-31 14:31

이집트는 인류 문명의 발상지이다.

아주 먼 옛날 역사 시대 이전에 드디어 인간들은 오랜 수렵채집 생활에서 벗어나 한곳에 정착하여 농사를 짓고 살수 있게 되었다. 특히 나일강 하류의 비옥한 삼각주는 농작물을 경작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농사를 지으면서 인간들은 안정적으로 잉여농산물을 확보할 수가 있었다.

그렇게 되자 인류는 떠돌이 부족 단위에서 대규모로 생산물이 축적되는 국가 단위의 공동체를 완성하게 되고 지배 계급과 피지배층으로 사람들의 신분이 분화되었다. 지배 계급은 일하지 않고 남는 시간 동안 즐길 거리가 필요했으며 인간의 유한성과 죽음 그리고 국가의 통치 이념과 지배 전략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종교, 문화, 정치, 사회제도가 발전하게 되었다. 인류 역사의 시작이다.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로 상징되는 고대 국가 이집트는 수천년 간 지속되었다. 유사 이래 어떤 나라도 고대 이집트만큼 오랜 기간 동안 번영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강력한 해양 세력인 그리스 문명이 나타나고 이 지역을 정복한 이후 이집트는 지중해 문명의 영향을 받게 되고 로마제국에 편입되었다. 아직도 기독교의 일파인 콥트 정교회가 이집트에 남아 있다.

이집트 제2의 도시 알렉산드리아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대왕이 자신의 이름을 따서 붙인 도시로 지중해와 인접하고 예부터 학술, 문화, 종교, 그리고 예술의 중심지이다.

이집트는 이슬람 발호 이후 이슬람의 세력권에 속해 있다가 강성해진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에 놓이게 된다. 수에즈 운하가 생긴 이후 이집트는 영국과 최대 식민지인 인도를 연결해주는 전략적 요충지가 되었으며 1882년 이후 영국이 군사적으로 점령하고 있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3.1 독립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 이집트에서도 자주와 독립을 위한 ‘1919년 혁명’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이어받아 1922년 독립국가 선포되었으나 이는 말뿐인 독립으로 실제로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으로부터 분리되어 영국의 보호국임을 공식화한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때부터 진정한 독립국가를 꿈꾸는 세력들이 생겨났다. 청년 장교 나세르도 그 중에 한 사람이었다. 나세르는 팔레스타인을 내쫓고 나라를 세운 유대인 국가 이스라엘과의 1948년 전쟁에 참전하여 이집트 군부의 부패를 목도하고 영국의 주구가 된 이집트 지배층의 실태를 알게 된다.

이후 비밀리에 자유 장교단을 결성하고 1952년 구테타를 감행하여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선언한다. 또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고 아랍 민족주의를 주창했다.

나세르는 냉전 시대에 제3세계의 젊은 지도자로 우뚝 섰으며 1955년 반둥 회의에서 인도의 네루 총리, 인도네시아 대통령 수카르노,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와 함께 비동맹 세력을 이끌었다.

나세르의 아랍 민족주의에 고무되어 1958년 마침내 아랍연합공화국이 등장했다. 이집트와 시리아가 나라를 합친 것이다. 결국 중동 지역과 아랍 세계 전역에 대통합의 움직임이 거세게 요동쳤다. 1958년 이라크에서 혁명이 일어나 왕정을 전복하고 혁명 정권을 출범시킨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아랍세계의 대통합 움직임에 가장 큰 위협을 느끼는 나라는 이스라엘이었다. 1967년 제3차 아랍과 이스라엘 간의 중동전쟁이 일어나고 불과 6일만에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스라엘군이 아랍연합군을 초토화시켰다.

국가적으로 이집트는치명상을 입고 나세르의 위상은 땅에 떨어졌다. 6일 전쟁의 충격으로 병을 얻은 나세르는 1970년 심장병으로 급사하게 된다.

나세르 사후에 한때 혁명 동지였던 후계자 사다트 대통령은 현실적 온건주의로 외교 노선을 전면 수정하면서 이스라엘과 단독으로 협상을 하고 친미 노선을 걷게 된다. 아랍인들은 사다트의 이런 배신에 분노하게 되고 결국 1981년에 기념식 단상에서 총격을 받고 사망하게 된다.

사다트 대통령의 뒤를 이은 무바라크는친미 노선을 견지하면서 군부 세력을 바탕으로 30년간이나 장기 집권하고 독재자로 군림하게 된다.

2011년 북아프리카를 강타한 민주화의 열풍 ‘아랍의 봄’은 이집트를 비켜가지 않았다. 국민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결국민중의 힘으로 독재자 무바라크를 하야시킨다.

이집크 국민들은 열광했다. 이후 선거를 통해 무슬림형제단 출신의 무르시 대통령이 민선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이집트에서 아랍 민주화는 서방이 바라는 서구식 민주주의의 아랍세계 정착이 아니라 선거를 통한 재이슬람화였던 것이다.

당장 왕정 국가 사우디는 등골이 오싹해졌고 이스라엘과 미국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집트의 주류세력인 군부와 세속주의 세력은 아랍 민족주의를 대표하는 이슬람 정권을 용납하기 힘들었고 다수인 이슬람 세력은 지방에 주로 거주하는 힘없는 국민들이었다. 게다가 경제 사정이 좀처럼 나아지질 않았다.

2013년 출범한 지 1년 만에 무르시 대통령은 군부에 의해 축출되었다. 그리고 당시 쿠데타를 주도한 국방장관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이듬해 대통령에 취임하여 올해 재선되었다.

그가 바로 ‘파라오’라 불리는 엘시시 대통령이다. 결국 돌고 돌아 다시 군부 출신에 의한 통치가 되었고 언론의 자유와 정치적 반대 의견에 대한 탄압도 심해졌다. 나세르가 아랍 세계의 중심 국가로 위상을 드높였던 이슬람 대국 이집트는 과연 어디로 갈 것인가? 귀추가 주목된다.

기선완 교수는
1981년 연세의대 입학하여 격동의 80년대를 대학에서 보내고 1987년 연세의대를 졸업했다.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인턴과 레지턴트를 마치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를 취득했다. 이후 건양대학병원 신설 초기부터 10년 간 근무한 후 인천성모병원을 거쳐 가톨릭관동대학 국제성모병원 개원에 크게 기여했다. 지역사회 정신보건과 중독정신의학이 그의 전공 분야이다. 최근 특이하게 2년 간 아랍에미레이트에서 한국 의료의 해외 진출을 위해 애쓰다가 귀국했다.

이기수 의학전문기자 ks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