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전 대통령이 1920년 6월 비서 ‘김노디’와의 불륜 때문에 미국에서 수사와 재판을 받았다는 의혹은 사실일까. 민족문제연구소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 ‘백년전쟁’이 이 같은 내용을 담아 이 전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사자명예훼손’ 사건에 대한 1심 선고가 29일 내려졌다. 법원은 배심원단의 평결을 반영해 무죄로 결론 내렸다.
다큐멘터리 감독 김지영·최진아씨에 대한 국민참여재판이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부장판사 김태업) 심리로 진행됐다. 검찰과 변호인은 27일부터 이틀 간 치열한 ‘사료전쟁’을 벌였다. 100년 전 작성된 미국 이민국 공문, 독립운동 기관지, 각종 저서 등 학술자료들이 법정에서 공개됐다.
배심원의 평결은 최씨에 대해서는 유죄 의견 1명, 무죄 의견 8명이었다. 김씨에 대해서는 2명이 유죄 의견, 7명이 무죄 의견을 냈다. 검찰의 구형은 각각 벌금 500만원씩이었다.
초점은 이 전 대통령이 비서 김노디와의 불륜으로 미국에서 수사와 재판을 받았는지, 사실이 아니라면 영화를 제작한 두 감독은 고의로 이 같은 내용을 넣었는지 여부에 맞춰졌다.
김씨 등이 2012년 제작한 영화에는 이 전 대통령이 1920년 6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맨법(Mann Act)’ 위반으로 체포돼 재판까지 받았다는 내용이 담겼다. 맨법은 1910년대 만들어진 법률이다. 성매매 및 음란행위 등 부도덕한 목적으로 여성과 주(州)의 경계를 넘는 행위를 처벌하도록 했다. 다큐멘터리에는 이 전 대통령이 김노디와 시카고에서 샌프란시스코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맨법 위반으로 조사를 받고, 재판에 넘겨져 기각됐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이에 이 전 대통령 아들 이인수씨는 2013년 5월 사자명예훼손으로 김씨 등을 고소했다.
검찰은 ‘백년전쟁’의 내용을 맨법 위반, 독립성금 횡령 등 크게 6개 범주로 나눠보고 맨법 위반 부분에 대해서만 사자명예훼손 혐의를 적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국민일보 2017년 10월 30일자 2면 참조). 4년6개월 만인 지난해 11월 김씨와 최씨가 불구속 기소됐다.
검찰은 김씨 등이 사실 확인을 거치지 않고 허위사실임을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이 전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하기 위해 이 같은 내용을 다큐멘터리 영화에 포함했다고 주장했다. 허위사실이란 점을 입증하기 위해 1920년 6~8월 작성된 미국 이민국 공문, 김노디의 이민국 진술서, 같은 해 7월 15일자 신한민보 보도 등을 제시했다. 또 김씨 등이 미국의 학자 로버트 장에게 보낸 이메일 등을 근거로 사실 확인을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변호인 측은 이 전 대통령의 맨법 위반 여부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직도 역사학계에서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고 주장했다. 로버트 장이 집필한 저서 ‘하와이의 한인들’과 당시 미국 형사절차법의 특성 등을 근거로 이 전 대통령이 맨법 위반으로 사법처리됐음을 합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큐멘터리 영화의 특성상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또 변호인은 “(박근혜정부에서) 정치적 의혹을 뒷받침 할 수 있는 증거들을 확보했다”며 “이 사건이 매우 정치적이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두 피고인은 끝까지 결백을 호소했다. 최씨는 “허위사실임을 알았다면 왜 끝까지 관련 사료를 찾기 위해 노력했겠느냐”며 반문했다. 또 다큐멘터리 영화 ‘화씨 911’ ‘식코’ 등을 제작한 미국의 대표적인 영화감독 마이클 무어를 언급하며 “그가 영화를 발표할 때마다 미국에서는 진위논란이 벌어진다. 이를 반박하는 글이 나오고 영화가 만들어지는데, 우리 사회가 이러한 과정을 겪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씨는 “타임머신이 있다면 1920년 미국 이민국을 찾아가 이승만 본인의 해명서를 미국 법정에 제출할 것”이라며 “그러면 이 전 대통령과 김노디는 맨법 위반과 위증죄까지 더해져 가중처벌 돼 교도소에 수감되고 조선으로 추방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것이 맨법 사건의 진실”이라고 주장했다.
재판에는 검찰 측 증인으로 이인수씨와 오영섭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교수, 양측 변호인으로 영화평론가 강성률 광운대 교수, 변호인 측 증인으로 김민철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가 출석했다. 이씨는 “‘백년전쟁’의 내용이 기정사실화 돼 국가의 정체성을 잃을 것 같았다”며 김씨 등을 고소하게 된 경위를 밝혔다.
오 교수와 김 교수는 역사학자로서 상반된 주장을 펼쳤다. 오 교수는 “미주지역 독립운동 세력 사이의 알력 다툼 속에서 경쟁 세력이 이 전 대통령을 음해한 결과”라고 주장했다. 반면 김 교수는 “이 전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 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수천명의 조선인이 학살당한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교민들이 어렵게 모은 성금을 가지고 중남미로 떠났지만 일제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활동했다는 어떤 기록도 남아있지 않았다” 며 “(이처럼) 이 전 대통령 행적 중에는 (독립운동가로서) 설명 불가능한 행보가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백년전쟁’과 관련한 행정소송은 아직 대법원에 아직 계류 중이다. 이날 사자명예훼손 사건 1심 결론이 일정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2013년 7월 방통위는 ‘백년전쟁’을 방송한 시민방송 RTV에 대해 “방송심의규정상 객관성·공정성·명예훼손 금지 조항을 위반했다”며 관계자 중징계 결정을 내렸다. 이에 시민방송은 “제재조치를 취소해달라”며 방통위를 상대로 소송을 냈지만 1심과 2심 모두 방통위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특정 자료만을 근거로 지나치게 일방적이고 부정적인 시각으로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전직 대통령을 폄하했다”며 “해당 프로그램이 전체 관람가로 두달에 걸쳐 55회나 방영해 위반의 정도가 중하다”고 지적했다.
이가현 기자 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