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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갔습니다. 무디(Moody)는 동굴 같았습니다. 내벽에 회색 시멘트가 두껍게 발려있고 공기도 서늘해서 그랬나봅니다. “날이 덥죠? 칵테일 한 잔 하세요.” 바(bar) 테이블에 앉아 있는데 거뭇한 턱수염의 남자가 곰처럼 나타나 칵테일 한 잔을 건넵니다. 곰을 마주한 건 지난 12일 오후 5시쯤. 가게 안엔 제목을 알 수 없는 재즈 음악이 흘렀습니다. 동굴 속에서 재즈를 들으며 칵테일을 마시는 것 같은 약간은 몽환적인 기분.
칵테일을 건네는 남자의 손가락이 가늘고 길었습니다. 매우 섬세한 곰 같다는 생각을 할 때 바를 운영하는 정원준(33)씨가 “자신은 원래 곡을 쓰는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그의 음악 얘기는 40분 정도 이어졌습니다. 음악을 반대하는 어머니를 설득하려고 고등학생 때 일본으로 가출을 했었답니다. 우에노 거리에서 일주일간 노숙하며 음악을 하네 마네 실랑이를 벌입니다. 어렵게 허락을 받아낸 뒤 귀국합니다. 그가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챙긴 건 중고시장에서 구입한 빨간색 건반 하나뿐이었죠.
실용음악과에 진학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그렇듯 인생은 꿈꾸는 대로 흐르지 않았습니다. 곡은 안 써지고 수업은 듣기 싫고 오디션은 떨어지고 데모 테이프를 보낸 기획사에선 연락이 오질 않았답니다. 벌이는 있어야겠기에 뮤지컬 음향감독으로도 일하고 전산망 관리 회사에서 월급쟁이 생활도 해봤습니다. 클럽에서 음악을 트는 DJ 활동도 했었는데 오래하진 않았답니다. 이런 생각 때문이었죠. “제 꿈은 곡을 쓰는 거잖아요. 그런데 남의 노래를 틀고 있는 제 모습을 어느 순간 발견했을 때, 제 자신이 굉장히 씁쓸하고 초라하게 느껴졌어요.”
내 모습을 발견한다는 것.
원준씨는 ‘나를 발견하고 싶을 때’ 바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대화할 때 통상 마주보고 앉습니다. 상대를 바라보고 이야기하기 위해서죠. 그런데 마주할 상대가 없는 바 테이블에 앉으면 나 자신이 보인다고, 원준씨는 말했습니다. 그래서 대학 시절 친구들이 소주병을 들고 부어라마셔라 할 때 혼자 술자리를 빠져나와 단골 바에 가곤 했습니다. 1만원 짜리 싱글몰트를 홀짝 대면서 스스로를 돌아봤죠. 허세처럼 비춰질 수도 있지만 갈색 술병이 가지런히 전시된 벽을 마주하고 혼자 있을 때만큼은 고민과 걱정을 잊을 수 있었답니다.
그러다 2016년 9월 연남동 골목에 작은 바를 차립니다. 이름은 무디(Moody). 슬프든 기쁘든 위스키나 칵테일을 마시며 긴장을 푸는 분위기의 공간, 뭐 그런 비슷한 뜻입니다. 원준씨가 혼자 바에서 싱글몰트를 마시며 걱정거리를 내려놓았던 것처럼 말이죠. 사보이(Savoy Cocktail Book)나 라루스(LAROUSE Cocktail Book) 같은 칵테일 책과 유튜브를 보며 칵테일을 만들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칵테일을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자신이 만든 칵테일을 맛보는 것만으로도 매일 취해있을 정도였답니다.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도 소설을 쓰기 전엔 바텐더였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재즈 바를 차려 7년을 운영했죠. 그러다 바텐더를 그만둡니다. 그의 저서 ‘맛있는 칵테일을 만드는 법’엔 하루키가 바텐더를 그만 둔 이유를 유추할 수 있는 문장이 있습니다.
‘칵테일 맛은 연습이나 훈련이 아닌 선천적 재능에 달렸다.’ 이 문장이 떠올랐을 때 원준씨가 처음에 내 준 칵테일을 봤습니다. 잔은 이미 오래 전에 비어있었죠.
바 테이블에 앉아 있는 손님에겐 선뜻 먼저 말을 걸지 않습니다.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죠. 손님과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없었어요? 이렇게 묻자 손님 이야기는 꺼내놓기가 좀 그렇다 면서 머쓱한 듯 웃었는데 눈이 초승달 같았습니다. 그때 무디에는 재즈뮤지션 멜로우 키친의 연주곡 ‘별 하늘’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주 필자가 살던 곳이 상수동이어서 문패가 ‘상수동 사람들’이었던 건데 얼마 전 서교동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앞으론 ‘상수동·서교동·망원동·연남동’ 네 동네에서 인터뷰 한 뒤 그때그때마다 문패를 바꿀 계획입니다.
서울봅리(필명) seoulboble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