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객 20년’ 남현희, 태극마크가 만든 비대칭 골반

입력 2018-08-26 17:12 수정 2018-08-26 19:46
남현희는 지난 24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컨벤션센터 펜신 훈련장에서 만난 국민일보 기자에게 은퇴를 말한 뒤 사진 한 장을 건넸다. 왼쪽(붉은 원)이 오른쪽보다 비대해진 자신의 엉덩이뼈 후방 엑스레이 사진이었다.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펜싱 여자 플뢰레 개인전 16강이 열린 지난 20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컨벤션센터. 두 검객이 투구 속에 비장한 표정을 감추고 피스트에 올랐다. 자신에게 검을 겨누는 누구든 적으로 무찔러야 하는 피스트는 그야말로 전장이다. 이 전장에서 최후의 승자가 될 때까지 상대를 찌르고 또 찔러야 한다. 검객의 운명이다.

운명은 때때로 심술을 부려 같은 조국의 검객을 피스트 위에 올려놓는다. 남현희(37·성남시청)와 전희숙(34·서울시청). 한국 여자 펜싱의 ‘투톱’이 서로를 노메달로 밀어내야 하는 운명의 장난에 휘말렸다. 검객이 득점할 때마다 환호성을 질러 상대의 기를 죽이는 펜싱의 다른 경기와 다르게 둘의 승부는 적막 속에서 흘러갔다. 그리고 결과는 남현희의 패배였다.

8대 13의 완패였다. 4년 전 인천아시안게임에서 자신을 넘어섰던 ‘도전자’ 전희숙은 이제 2연패를 달성한 ‘최강자’로 성장해 있었다. 그렇게 남현희의 생애 마지막 플뢰레 개인전이 끝났다. 남현희는 사흘 뒤 같은 곳에서 열린 여자 플뢰레 단체전에서 전희숙과 동메달을 합작하고 피스트를 떠났다. 남현희는 2022 도쿄 하계올림픽에 도전하지 않을 계획이다.

남현희는 지난 5월 무릎 연골 반월판 수술을 받았다. 아시안게임 개막을 3개월 앞두고서였다. 수술 후유증은 개막을 앞두고 기적적으로 사라졌다. 문제는 다른 부위에서 발생했다. 피스트에 오를 때마다 왼쪽 골반이 말썽을 부렸다. 남현희는 검으로 상대를 찌르면서 왼발을 내미는 동작만 20년을 반복했다. 그 결과 왼쪽 엉덩이뼈가 오른쪽보다 비대해졌다.

남현희(왼쪽)가 지난달 10일 충북 진천 국가대표 선수촌에서 훈련에 매진하고 있다. 진천=윤성호 기자

남현희가 지난 24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컨벤션센터 펜싱 훈련장에서 사진을 촬영하는 국민일보 윤성호 기자의 카메라 정면으로 칼을 찌르고 있다. 남현희는 칼을 뻗으면서 늘 그랬던 것처럼 왼발을 내밀었다.

남현희가 지난 4월 12일 충북 진천선수촌에서 촬영한 엑스레이 사진을 보면 오른쪽보다 3배가량 비대해진 왼쪽 엉덩이뼈가 선명하게 나타난다. 남현희는 이미 알고 있었다. 생애 마지막 피스트에서 무찔러야 했던 적은 자신에게 검을 겨눈 상대, 그리고 한계의 신호를 보내는 자신의 몸이었다.

숨이 차고 통증이 느껴져도 ‘더 할 수 있겠다, 더 해도 되겠다’며 마음을 다잡았던 적도 있었다. 이제는 몸의 신호를 솔직하게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먹었다. 남현희는 지난 24일 자카르타 컨벤션센터 펜신 훈련장에서 자신의 은퇴 사실을 국민일보에 알렸다. 그러면서 “아프다”고 말했다. 그는 사진 한 장을 보여줬다. “이게 내 엉덩이뼈입니다.”

김철오 기자, 자카르타=이경원 기자 kcopd@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