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선수생활 은퇴를 선언한 한국 펜싱의 남현희(37)는 “어려서는 ‘패기’로 하는데, 펜싱을 알수록 갑자기 무서워지는 순간이 생긴다”고 말했다. 국가대표 자리를 지킨 20년 동안 그의 무릎 연골은 사라졌고, 햄스트링 근육은 수없이 찢어졌다. 남현희는 “그래서 이번 아시안게임에 나설 때에는, 자신감에 더해 용기가 필요했다”고 말했다.
-94년부터 펜싱을 했다. 참 오래 했다.
종종 시합 전에 그런 이야기가 귀에 들려와요. 펜싱은 심리전을 하거든요. ‘야, 쟤 서른여덟이야. 끌고 다녀. 많이 움직여.’ 국내대회 뿐 아니라 국제대회에서도 나이를 이야기하는 게 들려요.
하지만 어제 경기만 해도 제가 시간활용을 다 했고, 결국은 13점을 따고 4점을 내주며 나왔습니다. 그 정도 시합 하고서 나와서 제가 쓰러진 것도 아니예요. ‘어, 이거 내가 관리를 조금만 더 했다면?’ ‘퍼펙트하게, 쪼이면서 할 수 있겠는데?’ 하는 아쉬움이 남아요. 어떻게 보면 나이는 극복해 온 것입니다.
-선수생활 내내 신장의 열세와 싸워 왔다. 장비는 다른 선수들과 같은가. 칼도 작은가.
달라요. 제 칼은 작아요. ‘블레이드’라고 부르는 검 부분의 길이는 같지만, 자기 손에 맞춰야 하는 손잡이는 서로 달라요. 밥그릇 모양으로 생긴 ‘가드’ 부분이 달라요. 저는 힘이 부족하고 속도로 승부해야 하기 때문에 손잡이도 작아야 했어요. 칼을 잘 가지고 놀려면, 다른 선수들에 비해 전체 길이가 짧을 필요가 있었어요.
-남현희는 칼부터가 날래야 했구나.
그렇죠. 검에 무척 예민한 게 펜싱이예요. 펜싱은 느리게 해도 안 되고 빠르게 해도 안 돼요. 강약이 필요하고 전술이 이뤄져야 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선수 파악을 많이 하고 패턴을 다양화하면서 제 걸 찾았어요.
-다른 장비도 달랐겠다.
장비 탓을 하는 것처럼 들리겠지만, 저는 지금까지 제게 맞는 펜싱화를 신어본 일이 없어요. 지급되는 펜싱화의 사이즈가 220㎜인데, 말은 220㎜이라 하는데 신어 보면 230㎜이예요. 그나마 그게 가장 작은 펜싱화래요. 220㎜를 신는 여자 선수들이 많은데 저보다 발이 커요. 저는 10㎜ 이상 큰 펜싱화를 선수생활 내내 신어 왔어요. 어쩔 수 없죠.
남현희는 멋쩍어 하며 펜싱화를 벗었다. 엄청난 높이의 깔창이 안에 들어 있었다. 남현희는 “인솔이라 하는데, 일반 깔창보다 두껍죠”라고 말했다.
-남현희가 평생 10㎜ 큰 펜싱화를 신고 메달을 땄다니? 자신의 펜싱화를 따로 맞춰 제작할 수는 없는 것이었나.
저희 스폰서(아디다스)에게 물어봤을 때, 대중적인 것이라면 3000만원에 본을 떠서 새로운 사이즈를 제작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사 갈 것이니까. 그런데 펜싱화는… 대중적이지도 않고, 200㎜보다 작은 것을 살 사람이 없으니, 만들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이지요.
-고충이 컸겠다.
저는 다리를 찢어요. 다리를 찢고 공격했다가 안 되면 백(back)을 해야 하는데, 백을 할 때 발가락이 전부 앞쪽으로 쏠렸다 들어오니까 체력 소모가 더 큰 겁니다. 그걸 그냥 받아들이며 뛰어야 하는 게 힘들었습니다. 저는 제 펜싱화가 커서, 경기를 할 때 피가 안 통할 때까지 신발끈을 조여 묶어요. 신발 잘 맞으면 더 잘 할텐데, 하는 그런 생각도 선수생활 하면서 많이 했죠.
그립 역시 제 손에 맞은 적이 없어요. 유럽에서 만든 장비이다 보니… 제가 검을 약간 꺾었어요. 알아보시는 분들은 ‘너 칼 좀 특이하게 쓴다’고 알아보십니다. 빠른 것도 살려야 하겠고 검은 좀 (균형이)잡혔으면 좋겠고… 다른 선수들이 놀라요. ‘왜 언니는 칼에 스냅이 안 들어가요?’ 저는 칼을 조립할 때 약간 틀어요.
-그렇게 어렵고 고통스러운데, 남현희는 펜싱이 왜 좋았나. 처음엔 이 길에 어떻게 들어선 건가.
어릴 때부터 뛰어노는 걸 좋아했어요. 중학생이 된 뒤 육상부에 들었다가 1주일 있다가 펜싱부에 발탁됐어요. 제가 키가 작잖아요. 키 순서로 학번을 매기는데 저는 2번이었어요. 그런데 한 반 52명 중에 제가 멀리뛰기를 1등을 한 거예요. 그 당시 체육 선생님이 펜싱 감독님이셨습니다. 절더러 ‘다리 찢는 팡트 동작을 잘 하겠다. 점프력이 좋다. 펜싱부로 옮겨라’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주변에서 ‘왜 펜싱이냐, 그건 비인기종목이다’하면서 만류하시는 거예요. 저는 한 번 시작하면 그 끈을 놓지 않습니다. 안 하겠다고 다시 말을 뒤집는 게 자존심이 상하는 거예요. 그렇게 펜싱을 94년부터 시작했습니다. 잘 하고 싶어졌어요. 중학교 2학년 때 개인전에서 중학교 3학년들을 이기고 전국 1위를 했어요. 고등학교 1학년 때에는 레벨이 다른 2학년 3학년들을 상대로 2위를 했어요. 신동 소리도 들었어요.
-신동, 맞는 말이지 않겠나.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쟤는 키가 작아 안 돼’ ‘쟨 국내용이야, 국제대회는 안돼’ 하는 편견에 시달렸어요. 결국 어릴 때부터 동기부여가 된 것 같아요. 그 편견을 깨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2008 베이징올림픽 때 제가 결승전 올라갔을 때, 코치님이 ‘현희야 이거 지금 한국에 방송되고 있대’라고 하셨어요. 비인기종목이라 하셨던 그 펜싱, ‘내가 드디어 펜싱을 알리는구나. 내가?’ 제가 감사한 거예요.
-은퇴경기를 했다고, 이제 그만 둔다고, 가족들에게 말했나.
네.
-가족들은 뭐라고 말해 주던가.
단체 카카오톡 방이 있어요. 시부모님을 합쳐 12명가량 계시는데, 매번 그 방에서 저를 칭찬해 주세요. 제가 지난 5월에 수술하고 6월에 아시아선수권에서 입상했거든요. 그때 ‘대단하다’ ‘고통스러운데 참는구나’ 늘 칭찬해 주셨어요. 이번 아시안게임 동메달에 대해서도 자랑스럽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가족 덕분에, 선수 복귀 후 6년을 견딜 수 있었어요.
[굿바이 남현희 ④]에서 계속됩니다.
자카르타=이경원 기자, 사진=윤성호 기자 neosar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