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상욱(22·대전대)은 두 살 터울의 형을 따라 취미로 펜싱을 시작했다. 초등학생 때였다. 검이 손에 익을 때쯤, 검객의 꿈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펜싱선수가 되고 싶다는 어린 오상욱을 부모는 야속한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어렵게 운동하는 아들은 맏이 하나로 충분했다. 무엇보다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다.
펜싱은 흉기를 다루는 종목이다. 선수 한 명에게 필요한 장비는 마스크, 흉갑, 장갑, 상의, 하의, 검이다. 하나 수십만원씩 들여 산 장비가 검에 찔리고 베이면 기우고 때우길 반복하고, 더 수리할 수도 없을 때 다시 구입해야 한다. 펜싱은 훈련장에서 쏟은 땀방울만큼 장비값이 늘어나는 종목이다.
자동차 부품 판매업자인 아버지의 외벌이로는 두 아들을 모두 펜싱선수로 길러낼 수 없었다. 오상욱은 부모의 뜻을 따라 펜싱부가 없는 중학교로 진학했다. 이런 오상욱을 발견한 ‘은사’는 박종한 대전 매봉중 펜싱부 감독이었다. 박 감독은 부모에게 전화를 걸고 또 걸었다. 그렇게 부모를 설득해 오상욱의 손에 다시 검을 쥐어줬다. 오상욱이 매봉중 1학년생이던 2009년의 일이다.
그해 대전지역 교사와 체육계 인사들은 가정형편이 어려운 유망주를 후원하는 ‘운동을 사랑하는 모임(운사모)’을 결성했다. 교사마다 적게는 매월 1만원씩 급여를 모았다. 정부·기업의 후원처럼 큰돈이 쌓이지 않았지만 좌절한 유망주를 일으켜 세우기에 부족함이 없는 금액이었다.
오상욱은 운사모의 장학생으로 선정돼 매월 20만원씩 후원을 받았다. 그렇게 중학생 때만 전국소년체전, 대한펜싱협회장배와 같은 주요대회에서 여덟 개의 금메달을 쓸어 담았다. 그야말로 혜성처럼 등장한 ‘검객 신동’. 하지만 여러 굴곡을 겪었던 오상욱은 시상대에서 자만하는 철부지가 아니었다. 자신의 꿈을 이뤄준 ‘키다리 아저씨’ ‘키다리 아줌마’들을 잊지 않았다.
오상욱은 성실하고 겸손하게 검객의 길을 걸었다. 이런 성품은 2011년 8월 25일 운사모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에 적은 글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당시 매봉중 3학년생이던 오상욱은 “장학생으로 뽑히고 운동을 즐기며 재미있게 하고 있다”고 수줍게 인사한 뒤 후원금이 헛되게 사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운사모 회원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듯 수상 내역을 상세하게 적었다. 그러면서 “더 땀을 흘려 운사모에 보답하고 싶다”고 인사했다.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펜싱 남자 사브르 개인전 결승이 열린 지난 20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컨벤션센터에서 은메달을 수확한 ‘미남 검객’ 오상욱은 그렇게 탄생했다. 그는 이 경기에서 14대 15로 분패했다. 상대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한국의 ‘펜싱황제’ 구본길(29·국민체육진흥공단)이었다.
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