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가방만 좀 챙겨 주세요!” “알았어!” 19일(한국시간)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의 태권도 품새 경기가 마무리된 자카르타 컨벤션센터. 안타까운 목소리의 주인공들은 막 중국을 꺾고 금메달을 따낸 한국 남자 품새 단체전 출전 선수들이었다. 아직도 도복을 입은 채인 그들은 관중석에 올라와 각자의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땅을 한 발로 딛고 기우뚱하게 선 김선호(20)를 강완진(20)이 들쳐업었다. 맏형 한영훈(25)이 김선호의 짐을 챙겼다.
김선호는 앞서 단체전 결승전 첫 연기를 펼친 뒤 갑자기 쓰러졌다. 가장 중요한 순간에 선수가 혼자 쓰러지자, 관중석을 가득 메운 이들이 ‘어어’ 하면서 더욱 놀랐다. “이러다 코리아가 지는 거 아니냐”는 인도네시아 관중도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때 김선호는 골반이 빠진 상태였다. 곽택용 품새 국가대표팀 감독은 “김선호는 2개월 전 대표선발전 때쯤에 골반이 빠졌고, 계속 치료를 하며 출전했는데 결승전 도중에 그게 또 빠졌다”고 했다.
상대와 겨루지 않는 태권도 품새지만 발차기 동작은 오히려 더욱 크고 격렬하다. 도약한 뒤 공중에서 900도(2바퀴 반)를 돌며 발차기를 하기도 한다. 한 차례 빠졌던 김선호의 골반은 수없이 과격하게 허리를 틀던 끝에 다시 제자리를 벗어났다. 곽 감독은 김선호에게 “괜찮겠냐,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김선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급처치로 틀어진 골반을 맞춰 넣었다.
김선호는 통증을 안고서도 끝까지 뛰었다. 3명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통일된 동작을 보여주는 가운데, 과연 누가 쓰러졌던 선수였는지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한국의 격이 다른 프리스타일 품새를 보는 자카르타 컨벤션센터의 태권도 팬들은 거듭해 감탄했다. 이윽고 전광판에 표시된 승자(winner)는 한국이었다. 3명은 태극기를 펼쳐 들고 경기장을 돌며 인사했다. 김선호는 때로 절뚝이며 행렬의 맨 뒤를 따랐다.
곽 감독은 “김선호가 정신력으로 그 상황을 이겨내려 한 것”이라고 말했다. 비록 몸이 아프지만 자기 때문에 형과 동기까지 결승전을 포기하는 것은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곽 감독은 “메달을 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면서도 “끝까지 최선을 다하면 메달의 색깔이 바뀌는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당초 태권도 대표팀이 품새 부문에서 세웠던 목표는 남녀 개인·단체에서 4개의 금메달을 ‘싹쓸이’ 하는 것이었다. 곽 감독은 “국제대회에서 전 종목 우승을 한 이력이 있는 만큼 종주국으로서의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며 아쉬워했다. 그는 “처음으로 국가대표가 2개월 반 동안 선수촌에서 훈련을 하며 혼연일체가 돼 있었다”고 했다. 실제 한국 선수들은 가장 큰 박수를 받았다.
김종기 태권도 대표팀 총감독은 “나가기만 하면 메달을 따던 시절은 지난 지 오래지만, 선수와 코치들은 죽기 살기로 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메달을 따면 본전, 못 따면 감독 코치는 목이 10개라도 모자란다”고 반농담을 했었다. 이제는 세계 모두가 열심히 하는 스포츠가 됐지만, 태권도에 대한 국민적 눈높이는 그만큼 높기만 하다.
태권도 대표팀이 세운 이번 아시안게임의 금메달 목표는 4년 전 인천아시안게임에서 땄던 것과 똑같은 6개다. 곽 감독은 “목표가 4개였던 우리는 2개만 땄고, 겨루기 선수들에게 2개를 떠넘기게 됐다”고 말했다. 한국 선수단에 첫 금메달을 선사한 그가 인터뷰 말미에 “슬프다”고 했다.
자카르타=이경원 기자 neosar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