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정부가 지난해 가정폭력 가해자 처벌을 완화시키는 법을 통과시킨 후 가정폭력 신고 건수가 절반 가까이 줄었다고 16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가디언이 보도했다. 시민단체는 가정폭력 신고 건수가 감소한 것은 피해자들이 가정폭력 문제를 공론화시키지 않고 혼자 참거나 시민단체에 도움을 요청하면서 생긴 착시효과라고 주장했다.
러시아 정부가 지난달 발표한 범죄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러시아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한 가정폭력 신고 건수는 2만 5667건으로 집계됐다. 2016년 4만 8765건에서 절반 가까이 줄어든 수치다.
전문가들은 가정 폭력 자체가 줄어든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여성폭력 추방 운동 단체 ‘안나센터’의 마리나 피스클라코바-파커 소장에 따르면 같은 기간 센터에 걸려온 가정폭력 상담 전화는 2만여건에서 2만7000여건으로 오히려 늘었다.
러시아에서 가정폭력 신고가 급감한 것은 지난해 2월 정부가 가정폭력 처벌 완화법을 통과시킨 후다. 이 법에 따르면 배우자나 자녀를 폭행해도 1년에 1회만 폭력을 행사하고 그 결과 뼈는 부러지지 않고 멍이 들거나 피가 났다면 15일 구류나 벌금 처분을 받는다. 기존 가정법에서는 가정폭력 가해자에게 최대 2년형을 선고하도록 했다.
파커 소장은 정부가 통과시킨 가정폭력 완화법이 러시아내 가정폭력 실태를 악화시켰다고 지적하며 “이 법은 정부가 가정 폭력을 여성 인권 침해 범죄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준다”며 “가정폭력 가해자들에게는 처벌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신호가 된다”고 덧붙였다.
러시아 내 여성 대상 가정폭력은 심각한 수준이다. 유엔은 2010년 한해 동안 러시아에서 가정폭력으로 사망한 여성이 1만2000여명에 달한다는 보고서를 내기도 했다. 러시아 스푸트니크뉴스는 러시아에서 일어나는 중범죄의 40%가 가정에서 발생한다고 분석했다.
가정 내 폭력에 관대한 러시아 사회 분위기 탓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러시아정부는 지난해 경미한 폭력에 대한 처벌을 완화하면서 가정폭력은 예외로 뒀다. 그러자 러시아정교회가 “애정이 담긴 합리적인 처벌은 신이 허락한 부모의 권리”라며 문제를 제기했을 정도다.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여기에 호응하며 가정폭력 완화법에 서명했다.
전 세계에 몰아닥친 미투 열풍이 러시아를 빗겨간 것도 여성에게 불리한 법체계와 가정폭력에 관대한 사회 분위기 탓이라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이택현 기자 alle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