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한반도를 비켜가고 있다. 제14호 야기는 중국 내륙 쪽으로 서진했고, 제15호 리피는 일본 남쪽 해상을 맴돈 뒤 소멸될 것으로 보인다. 올여름 발생한 태풍 12개가 모두 한반도의 폭염을 뚫지 못한 셈이다. 폭염의 연전연승. 태풍의 ‘코리아 패싱’은 계속되고 있다.
기상청은 12일 “야기가 오전 9시 일본 오키나와 서남서쪽 약 300㎞ 부근 해상에서 서북서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태풍은 오는 13일 오전 9시 상하이 남서쪽 약 120㎞ 부근 육상으로 진출할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 서쪽 해상을 따라 북진할 것이라는 당초 예상과 다르게 중국 내륙으로 경로를 바꿨다.
야기는 중심 기압 990hPa, 최대 풍속 76㎞/h의 소형 태풍이다. 기압이 낮아졌고 풍속이 빨라졌지만 바람의 강도는 여전히 약하다. 중국 내륙 동부를 타고 북상해 오는 14일 오후 9시 칭다오 서쪽 약 280㎞ 부근 육상에서 소멸될 것으로 예상된다. 기상청은 “이 태풍이 60시간 안에 열대저압부로 약화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야기의 후속주자로 북진하는 리피는 이날 오전 3시 괌 북쪽 해상에서 발생했다. 6시간 뒤 괌 북북서쪽 약 910㎞ 부근 해상까지 진출했지만 한반도까지 다가올 정도의 힘을 갖지 못했다. 기상청은 이 태풍이 오는 14일 일본 가고시마 동남동쪽 약 460㎞ 부근 해상에서 열대저압부로 약화돼 사실상 소멸할 것으로 전망했다.
기상청의 분석대로면 지금 살아있는 태풍 2개는 모두 한반도로 접근하지 않는다. 올해 발생한 15개, 기간을 여름으로 한정해도 6월 이후에 발생한 12개의 태풍이 모두 한반도를 비켜간 셈이다. 연간 발생하는 태풍은 25개 안팎. 앞으로 발생할 태풍은 10여개다.
태풍은 인명·재산 피해만 없으면 바람을 일으켜 더위를 식히고 비를 뿌려 가문 땅을 적시는 기상현상이다. 농지가 가물고 채소 가격이 폭등하며 하천에 녹조 현상이 발생하는 재난 수준의 폭염 속에서 태풍은 반가운 ‘손님’이 될 수도 있다. 열대야만 20일을 넘긴 한반도는 폭염의 재난을 극복하기 위해 태풍의 재난을 기다리고 있다.
태풍이 한반도에 상륙하지 못한 이유는 한두 가지 요소로 설명되지 않는다. 올해의 경우 한반도에 폭염을 몰고 온 고기압이 태풍의 진입을 가로막고 있다는 분석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기상청이 오전 9시 관측한 일기도에서 동해상에 북태평양 고기압, 중국 내륙에 대륙성 고기압이 위치해 있다. 한반도는 이 틈에 끼어 있다. 고기압은 여름 내내 한반도 주변을 맴돌며 태풍을 튕겨내고 있다.
올해 한반도 앞까지 다가온 태풍은 제7호 쁘라삐룬이 유일했다. 쁘라삐룬은 지난 6월 29일 필리핀 동쪽 해상에서 출발해 대한해협을 아슬아슬하게 관통하고 지난달 4일 동해에서 사라졌다. 제주도와 영남권에 하루씩 비를 뿌렸지만 그 이상으로 한반도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기상청은 쁘라삐룬을 ‘상륙 태풍’으로 기록하지 않았다.
제10호 태풍 암필은 지난달 18일 필리핀 동쪽 해상에서 발생, 북동진 중 방향을 살짝 틀어 한반도 쪽으로 다가오는 듯 했지만 결국 중국 서부로 들어가 같은 달 24일 내륙에서 소멸됐다. 제12호 태풍 종다리는 지난달 25일 괌 북서쪽 1110㎞ 해상에서 출발했지만 한반도 진입 목전에서 힘을 잃고 일본에서 유턴해 남쪽으로 내려갔다. 지난달 29일 열대저압부로 약화됐다.
태풍의 코리아 패싱은 2년쯤 된 일이다. 한반도에 상륙한 사례로 기상청에 기록된 마지막 태풍은 2016년 10월 부산·울산 앞바다를 지나간 그해 제18호 차바였다. 이 태풍은 쁘라삐룬과 비슷한 경로로 이동해 한반도 동남부를 스쳤을 뿐 내륙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최대 풍속 49.0 m/s의 강력한 바람을 몰아쳐 8500억원에 이르는 재산피해를 냈다.
한반도를 관통한 태풍은 6년째 나타나지 않았다. 2012년 9월 경남 통영으로 들어온 그해 제16호 산바가 마지막이었다. 이 태풍은 통영에서 내륙으로 북동진해 동해로 빠져나갔다. 중심기압이 890hPa까지 떨어져 그해 가장 강력했던 태풍으로 기록됐다. 중심부에서 930hPa 이하의 기압이 관측되면 매우 강한 태풍으로 평가된다.
야기는 한반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아도 대기를 순환해 폭염을 식힐 가능성이 있다. 중국 내륙을 지나가는 과정에서 대륙의 기압골을 바꿔 찬 공기를 끌어들이면 한반도의 무더위를 누그러뜨릴 수 있다는 얘기다. 기상청 관계자는 “야기가 지나갈 오는 15일 이후에 대륙에서 찬 공기가 내려올지, 북태평양 고기압의 강세로 폭염이 계속될지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