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명 신상 암기해” 목숨 끊은 신병, 22년 만에 가혹행위 인정

입력 2018-08-12 11:41

부대 전입 5일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신병에 대해 법원이 가혹행위가 원인이라고 22년 만에 인정하면서 마침내 보훈 보상 대상자에 포함됐다.

12일 법원에 따르면 서울행정법원 행정13부(부장판사 유진현)는 이모씨가 서울지방보훈청장을 상대로 낸 보훈보상대상자요건 비해당 결정 취소 청구 소송에서 “피고가 원고에 대해 한 처분을 취소한다”고 지난달 26일 판결했다.

1996년 4월 공군 한 부대에 전입한 신병 이모씨(당시 20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유를 두고 군은 ‘평소 내성적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전입 23일만에 부대 초소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됐고, 팔목에는 부대 지휘관들의 관등성명과 차량번호 등이 적혀있어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으나 군은 “심리적 어려움을 겪었다”며 군복무와 무관한 자살로 결론내렸다.

유족들은 반발했다. 사망 원인은 군에서 이뤄진 가혹행위때문이라고 주장했다. 2012년과 2013년, 그리고 2016년 국가유공자로 등록해달라는 신청을 했지만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군은 가혹행위와 무관하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지난해 마침내 순직이 인정됐지만 국가유공자나 보훈보상대상자로 지정하지는 않았다. 국방부는 “사망과 직무수행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다”며 이씨의 순직을 인정했다. 하지만 서울지방보훈청은 “가혹행위가 있었다는 구체적인 증거가 확인되지 않는다”며 국가유공자나 보훈보상대상자 인정은 거절했다.

사건 재조사 결과에 따르면, 사망 당시 신병이던 이씨는 부대 지휘관 약 200명 차량번호와 관등성명, 부대 병사 기수표 등을 암기하도록 선임병으로부터 지시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부대에 전입하고 3일 안에 A4 용지 4~5쪽 분량의 내용을 모두 외워야 했다. 사망 당일에도 암기에 매진했던 것으로 보인다. 초소 근무에 들어가기 전에 점심식사를 거르며 화장실에서 내용을 암기했고, 사망 직전에도 선임병에게 수시로 꾸중을 들었다고 한다.

유족은 국가유공자 및 보훈보상대상자로 인정해달라며 소송을 제기했고 마침내 법원은 “이씨의 자살은 군복무와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다”며 유족의 손을 들어줬다. 사망한 지 22년만이다.

보훈청은 이씨의 사망 원인을 내성적인 성격과 집안 불화라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이씨가 가정환경이 괜찮다고 얘기했고, 항상 성실하고 잘 하려는 의지가 강했다’는 동료 부대원들의 진술을 근거로 “입대하면서부터 자살을 결심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고 판단했다. 국방부의 순직 결정에 대해서는 “이를 배척할 특별할 사정이 없다”고 봤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