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우처는 낯선 세계에서 온 이들을 만나 강한 인상을 받았다. 동시에 ‘조선’이라는 극동의 어느 미답지는 좋은 선교지라고 확신했다. 이 만남이 있고서 그는 미 북감리회 해외선교부에 1000달러를 기증하고 조선에 선교사를 파송해 달라고 했다.
가우처는 또 일본 주재 감리교선교회 책임자 맥클레이 목사에게 조선 선교 전망을 타진했다. 맥클레이는 가우처의 제안을 받아 들여 1884년 6월 한국을 방문해 정권 실세 김옥균을 만나 고종에게 ‘미국이 한국에 병원과 학교를 세울 수 있게 해달라’는 친서를 전했다.
그 때의 왕이란 의사 결정을 하는 존재가 아니다. 신하들이 정무적으로 결정한 일을 듣고서 “알았다”고 답하는 것으로 끝이었다. 그래야 왕의 존엄이 살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 선교 허락은 정치적 실세 김옥균이 했다. 그는 기독교를 종교로 보지 않고 조선 개화에 유리한 문명으로 보았다. 미국 기독교의 병원과 학교 개원, 개교는 조선의 부국강화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았다.
갑신정변의 풍운아 김옥균은 한국 기독교가 기억해야 될 인물이다. 그는 충남 공주시 정안면 태생이다. 그가 나고 자란 8월 한 낮의 유허지는 텅 비어 있다. 3일천하에 끝난 혁명. 그러니 대역 죄인 집이 살아 남을 리 없다. 모조리 불태워졌다. 유일한 방문자인 나는 그를 위해 기도를 했다.
전정희 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