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예상치 못한 부진이다. 강동원 한효주 정우성 같은 톱스타들이 총동원됐고, 애니메이션계의 명작이라 칭송받는 원작이 있었으며, 190억원에 달하는 순제작비가 투입된 데다, 장르영화의 대가 김지운(54)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작품. 모든 걸 갖춘 듯했던 ‘인랑’의 흥행 참패는 이변을 넘어 충격으로까지 받아들여지고 있다.
2029년 통일을 앞둔 한반도로 옮겨진 배경까진 흥미로웠다. 그러나 SF라는 장르적 특성을 감안하고도 한국적 상황에 좀처럼 맞물리지 않는 설정들이 등장하면서 영화는 삐거덕거리기 시작했다. 특히나 경찰 특기대 에이스 임중경(강동원)과 반통일단체 섹트 일원 이윤희(한효주)의 빈약한 멜로 라인은 좀처럼 설득력을 얻지 못했다.
이 순간이 누구보다 뼈아플 사람은 김지운 감독이다. 개봉일인 지난 25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마주한 그는 이미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기대를 밑도는 예매율과 관객 반응을 확인한 뒤였다. 건강에 무리가 올 정도로 열과 성을 다해 완성시킨 영화를 향해 쏟아지는 부정적 비평들이 적잖이 당황스러웠을 테다.
“이 영화가 사실 안정적인 흥행 공식에 맞는 영화는 아니잖아요. 원작을 아는 사람들은 ‘이 어려운 걸 왜 하려고 하지?’ 생각했을 거예요. 연민과 우려, 기대가 섞인 복합적인 시선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죠. 그게 부담감으로 작용하기도 했고요. 하지만 저는 흥행을 위해 안정적인 방식을 택해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김지운 감독은 이 또한 “과정”이라 말했다. 이쯤에서 좌절할 생각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그는 “극 중 체 게바라(1928~1967) 책이 나오는데,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다. 끊임없이 기득권을 버리고 정글로 향했던 체 게바라처럼, 나도 멈추지 않고 새로운 걸 시도하며 정글로 뛰어들 것이다. 늘 그렇게 영화를 만들어 왔다”고 했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 보인다. 촬영 때부터 몸이 안 좋으셨다 들었는데 건강은 괜찮으신가.
“영화를 보시면 알 거예요. 김지운의 수명이 저기 다 들어가 있구나(웃음).”
-영화화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강화복이나 대규모 지하수로 등 원작의 특수한 설정들을 재현하는 것도 까다로웠을 테고. 애를 많이 쓰셨을 텐데.
“애쓴다고 완벽하게 구현되는 성질의 영화가 아니었어요. 실사화하기 진짜 어려운 작품이었죠. 새로운 세계관을 이해시키면서 볼거리를 함께 담아내는 게 되게 힘들더라고요. 주제의식도 뚜렷해야 했고요. 영화적 즐거움과 탄력도 떨어뜨리지 말아야했죠. 고민이 진짜 많았어요.”
-‘야만의 시대에 사랑이 가능한가’라는 명제에서 시작한 영화라고.
“우리나라에서도 배트맨 로보캅 아이언맨처럼 특수 강화복을 입고 펼치는 박력 넘치는 액션 오락영화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했어요. 그러기 위해선 개연성이 필요한데, 장르를 SF로 설정했으니 근 미래로 배경을 설정했죠. 미래의 불안을 다루면서도 현실감 있는 이슈를 설정해야 했고, 그것이 통일 이슈라고 봤어요. 권력 기간 간의 암투와 투쟁을 자연스럽게 끌고 들어올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그렇다면 그 안에서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을까, 가장 근본적인 사랑에 대해 질문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집단에 속한 개인이 시스템을 관통하면서 무언가를 깨닫게 되고 성장해가는 이야기인데, 자연스럽게 개인의 얘기가 두터워진 거예요. 사랑에 관한 얘기는 서브플롯이었죠.”
-막상 관객 평을 살펴보면 임중경와 이윤희의 로맨스가 극의 중심을 이루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의견이 많은데.
“로맨스를 추구한 건 아니었어요. 집단의 말에서 개인의 말로, 집단의 생각에서 개인의 생각으로 각성하는 인물의 이야기를 하고자 했죠. 그런데 왜 그런 반응이 나올까 복기를 해봤어요. 중심인물들 중 한상우(김무열)는 악인으로 그려졌으니 관객들이 그에게 감정을 투여하지 않은 것 같아요. 장진태(정우성)는 종결의 의미로 받아들였을 테고요. 고스란히 두 사람(강동원 한효주)의 관계만 남은 거죠.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구나 싶었어요.”
“서로 다른 입장에서 만난 두 사람이 결국 서로 같은 처지라는 걸 느끼고 교감할 거라 생각했어요. 집단을 대변하다 처음으로 개인의 애기를 하게 되는 거죠. 나는 개인으로 자각하는 과정으로 봤는데, 관객들에게는 로맨스의 과정으로 받아들여진 거죠. 로맨스로 보면 덜 표현된 부분이 있거든요. 그건 내 잘못일 수 있어요. 좀 더 확실하게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어야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이런 것일 수도 있어요. SF영화라고 마케팅이 되면서 관객들은 미국이 독점하고 있는 SF의 외양을 기대한 거죠. 할리우드가 확립한 SF의 미래상에 눈높이가 맞춰진 사람은 (‘인랑’처럼) 레트로한 SF를 봤을 때 갭을 느꼈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SF인줄 알았는데 로맨스네’라는 어긋남이 있었을 수도 있고요. 영화는 기대치와 다른 지점이 생겼을 때 그 작품의 완성도나 성취와 관계없이 (관객이) 이탈되는 폭이 제일 큰 매체인 같아요.”
-혹자는 두 주인공의 애정전선이 급진전되는 데 대해 의아함을 표하기도 한다.
“내러티브에 충실하지 않았다? 그건 아니에요. 다 장치들이 있었거든요. 예를 들면 남산에서 탈출할 때 서로 한 몸이 되잖아요. 굉장한 상징이죠. 다른 둘이 만나 하나로 묶어지는 관계. 그리고 윤희에게는 두려움이 있었어요. 구미경(한예리)이 ‘아무도 믿지 말라’는 말을 던지고 간 상황에 ‘저 사람에게 나를 맡겨도 되나’ 고민하죠. 그러다 순간적으로 ‘너를 믿겠다’는 표정을 지어요. 거기에 정확한 디렉션이 들어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둘은 언제 사랑한 거냐’고 물으면 난감한 거죠. 케이블카에서 서로를 처음 만났을 때의 표정, 남산 전망대 화장실에서 머리를 풀고 거울을 들여다보는 윤희, 국수가게와 버스에서 오가는 미묘한 감정들, 책방에 들어설 때 코와 입이 닿을 듯 말 듯한 상황, 정전이 됐다 램프를 켤 때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들, 감정이 충만해진 순간에 나누는 키스. 모든 걸 다 만들었거든요. 표면적인 것 말고도 미장센으로 전달되는 스토리도 있고요. 뭘 더 했어야 했나 싶은 게 솔직한 마음이에요.”
-임중경이 조직의 임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 죄책감을 느껴 온 인물이긴 하지만, 그의 모든 신념이 한순간 무너지게 되는 계기가 오로지 윤희인 것 또한 완전히 납득되진 않는다.
“자기랑 같이 있으면 윤희도 희생될 것이 빤하니까. 그것을 더 이상 겪고 싶지 않은 거죠. 그 사람에게 감정이 이입될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개인의 생각을 억압하는 시스템에 대한 불이행, 거부의 몸짓, 그 대상이 윤희잖아요. 사랑해서라기보다는 윤희를 구원함으로써 시스템을 이겨내는 것이 증명되는 거죠. 이 영화를 보면 벽이 굉장히 많이 등장해요. 인물들을 둘러싼 현실적인 벽을 상징하는 거죠. 계속 벽을 뚫고 나가야 해요. 시스템에서 벗어나 개인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한 남자의 여정을 그리면서, 그런 주제를 보여주기 위한 방식으로 택한 것들이죠.”
-몇몇 장면에서 배우의 대사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
“빗소리 등 사운드가 많이 들어가서일 거예요. 제가 워낙 사운드가 섬세하게 작용되는 영화를 좋아하거든요. 사운드를 통해 정서를 강렬하게 일으키는 경우가 많아요. 섬세한 사운드 디자인으로 오감이 채워지는 부분이 있죠. 그래서 사운드 작업을 세심하게 하는 편이에요. 소리도 많이 넣는 편이고요. 예를 들면, 배경음악 깔 때 시계소리를 넣으면 구체적인 액션 없이도 사람을 서스펜스에 빠뜨리게 돼요. 소리의 간극 하나로 극의 분위기를 강화시킬 수 있는 거죠.”
-최종 러닝타임이 138분인데, 감독님이 가장 만족하신 길이였나.
“좀 더 길었으면 했어요. 제일 좋았던 건 지금보다 10분 정도 긴 버전이었어요. 인물들에 대한 설명이 더 들어간 거죠. 변명일 수 있지만, 여름시장에 내놔야 하는 영화여서 후반작업이 너무 짧았어요. 3월에 촬영이 끝났는데 6월까지 완성해야 해서 충분히 영화를 들여다볼 시간이 부족했던 것 같아요. 근데 어쩌겠습니까. 나도 충분한 시간을 갖고 싶었지만 시스템이 억압을 줘서(웃음). 거의 쉴 새 없이 달려와서 힘들고 괴롭네요.”
-감독판이 나올 가능성도 있을까.
“있을 수 있죠. 넷플릭스 인터네셔녈 버전을 하나 만들 수도 있어요. 넷플릭스는 전 세계에 배급을 하는 거니까. 어쩌면 그게 감독판에 가까울 수 있겠네요. 영화를 충분히 들여다본 결과물일 테니까.”
-유독 스트레스가 큰 작업이었다고 들었는데, 가장 힘들었던 지점은 무엇이었는지.
“구체적인 이유는 없어요. 그런데 이번 작업을 하면서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놈놈놈’)이 생각이 많이 나더라고요. 그때도 무모한 도전이었거든요. 한국에서 서부극이라니, 모든 걸 만들어내야 했죠. ‘인랑’도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야 하는 거였잖아요. 그런 면에서 모든 것들이 스트레스였어요. 내가 해봤던 걸 다시 하는 게 아니니까. 그래서 생기는 불안감이나 두려움 같은 감정들이 덧붙여진 거겠죠.”
-꾸준히 새로움을 추구하는 뚝심은 보는 이들에게도 전해질 것 같다.
“예. 저 스스로도 알고 있으니까. 지금의 상황을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에너지로 삼아야죠.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칭찬을 들어도 우쭐하거나 즐겁지 않고, 실패하거나 꾸중을 들어도 크게 상심하거나 위축되지 않는 편이에요. 내가 가는 길은 내가 아는 거니까. 비평과 꾸짖음, 격려가 제게 자양분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