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와서 처음으로 화장하게 됐어요”… ‘꾸밈노동’ 부추기는 외모품평

입력 2018-08-05 15:15 수정 2018-08-05 19:58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제공

“어디 아프니? 오늘 얼굴이 왜 그래?”

여성이라면 살면서 한 번쯤 들어봤을 말이다. 화장 하나 안 했을 뿐인데 하루 종일 꽤 많은 사람들이 안부를 물어온다. 갓 스무 살이 돼 대학에 입학하는 순간 혹은 직장인이 되면서부터 여성들은 화장을 하지 않으면 ‘혈색이 안 좋다’ ‘입술에 색이 없다’는 말을 듣곤 한다. ‘예의 없다’거나 ‘자기 관리가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공들여 화장을 하고 한껏 차려입은 날에도 타인의 관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오늘 좋은데 가냐’ ‘남자친구랑 약속 있냐’ ‘오늘 무슨 날이냐’ 등 타인의 외모와 옷차림에 대해 지적하거나 묘사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농담처럼 건네는 이 말속에서 여자의 화장은 당연한 것이라는 인식과 타인의 외모를 평가하고 대화 주제로 삼는데 거리낌 없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다.


◆ “한국에선 여자가 화장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해… 관심받기 싫어서 나도 화장하게 됐다”

미국에서 7년간 유학을 하고 돌아온 A(29)씨는 “미국에 살면서 단 한 번도 외모를 묘사하거나 지적하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며 “그랬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화장을 하지 않았고, 트레이닝복을 입고 편하게 다닐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에서 유일하게 딱 한 번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었는데, 랭귀지 스쿨에서 만난 한국인으로부터였다”고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화장을 안 하면 안 하는 대로 ‘꾸미면 예쁠 것 같은데 왜 화장을 안 하냐’ ‘혈색이 안 좋아 보이니 립스틱이라도 발라라’는 지적을 받았고, 또 아주 가끔 화장을 했을 때도 ‘오늘 어디 가냐’ ‘꾸민 게 아까워서라도 어디 가야 된다’ 등의 말을 들었다”며 “이후 한국에 돌아와 학교를 다니고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그런 말을 지겹도록 들었다. 관심을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제는 그냥 화장을 하고 다닌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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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째 한국에 교환학생으로 와 있는 대만인 B(25)씨 역시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화장을 하게 됐다고 한다. 그는 “대만에서는 화장을 하지 않았는데 한국에 와서는 수업을 갈 때 매일 화장을 하게 됐다. 한국에서는 여자가 화장을 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학교만 둘러봐도 다들 예쁘고 멋지게 꾸미고 다니다 보니 화장을 하지 않은 채 다니는 사람은 나뿐인 것 같아 어색했다. 또 워낙 여기저기 화장품 가게가 많다 보니 어렵지 않게 화장을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사실 처음에는 매일 화장을 하고 예쁘게 옷을 차려입고 다니는 게 재밌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한 1 년 정도 이런 생활을 반복하다 보니 점점 귀찮아지기 시작했다”며 “특히 날이 더워지면서 화장을 하고 옷을 차려입는 것 자체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매일 아침 화장을 하는 한국인 룸메이트를 보면서 어떻게 저렇게 부지런할 수 있는지 새삼 신기하기도 하다. 나는 대만으로 돌아가면 더 이상 화장을 하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 ‘꾸밈노동’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은 여성들

화장에 대한 개인의 선호도를 떠나 여성의 화장을 기본으로 생각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여성의 ‘꾸밈노동’을 부추긴다. 그러나 강요하면 할수록 반작용 역시 도드라지는 법이다. 최근 세상이 바라는 ‘여성스러움’을 거부하며 화장하지 않을 권리, 코르셋을 입지 않을 권리를 주장하며 등장한 것이 바로 ‘탈코르셋 운동’이다. 탈코르셋 운동에 동조하는 여성들은 민낯에 짧은 커트머리, 운동화에 청바지, 콘택트렌즈 대신 안경을 착용하며 꾸밈노동으로 상징되는 여성 억압적 문화에 반기를 들고 있다.

탈코르셋 운동은 ‘여성소비총파업’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8월5일 두 번째로 진행되고 있는 여성소비총파업의 기획에 참여한 C씨 역시 해당 운동에 대해 “이는 궁극적으로 여성 인구의 중요성과 성차별 철폐를 위한 것이지만, 소비시장에서 ‘노동자’로서의 여성과 이들이 치러야 할 ‘꾸밈노동 비용’에 대한 비판도 함께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사진='여성소비총파업 공식계정(@K_W_G_C_S)' 트위터 캡처

C씨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우리는 이번 소비총파업에 동참하는 여성을 주체적인 소비가 가능한 ‘여성노동자’로 상정했다”며 “같은 노동을 하며 여성이 치러야 하는 비용이 너무 많다”고 지적했다. 그는 “여성과 남성이 동일임금을 받더라도 여성은 치마를 입어야 한다거나 스타킹, 화장품을 사야 하는 등 ‘꾸밈비용’이 들어간다. 여전히 사회는 ‘여성은 마르고 예뻐야 한다’는 식의 꾸밈노동에 여성을 밀어 넣는다. 우리는 이를 ‘여성억압비용’이라고 본다”고 주장했다.


◆ 우리가 멈추면 세상도 멈춘다, 두 번째 ‘여성소비총파업’ 운동

SNS를 중심으로 시작된 여성소비총파업은 여성들이 매월 첫째 주 일요일 꼭 필요한 것 이외에는 소비를 하지 않는 운동이다. 여성소비총파업 공식 SNS에는 “매월 첫째 주 일요일에 매출이 급감한다면 기업들 역시 원인을 찾을 것”이라며 “또한 여성 구매자들의 영향력을 재확인하게 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총파업 취지를 밝혔다. 그러면서 “이 운동이 제기하고자 하는 것은 사회적 차별에 대한 문제 제기일 뿐, 남성과 여성의 갈등을 야기하고자 하는 운동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5일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비를 하지 않았다는 내용의 글이 게시되고 있다. 이날 ‘#여성소비총파업’ ‘#38적금인증’ 등의 검색어가 트위터 실시간 트렌드에 오르내리고 있다. 파업에 동참한 D(27)씨는 “최대한 소비를 줄이고 우리의 목소리를 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주말 필수 출근이라 교통비가 들어가는 건 불가피한 일이지만 다른 모든 소비는 일절 하지 않겠다”며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여성들이 소비를 멈춤으로써 여성의 구매력을 보여주고, 궁극적으로는 성차별에 맞서 싸우는 것을 목표로 꾸준히 참여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주최 측은 이번 운동을 통해 여성들이 꾸밈노동에서 자유로워질 뿐만 아니라 여성용품의 품질 개선은 물론 임금 불평등을 개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여성 혐오적인 광고를 하는 기업을 걸러내고, 추가로 여성들이 성 평등한 기업을 이용하는 문화를 형성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봤다. 이를 위해 지속적으로 매달 운동을 전개할 예정이다.

사진='여성소비총파업 공식계정(@K_W_G_C_S)' 트위터 캡처

이번 여성소비총파업은 1975년 10월 24일 아이슬란드 여성들이 성 평등을 요구하며 하루 동안 직장과 가사노동, 육아 등을 모두 거부한 ‘여성 총파업’을 모티브로 삼았다. 여성소비총파업 주최 측이 내건 ‘우리가 멈추면 세상도 멈춘다’는 표어도 1975년 아이슬란드 파업과 지난 3월8일 스페인 여성 동맹파업에서 따온 구호다.

당시 아이슬란드 여성 인구의 90%가 파업에 동참했으며, 노동과 소비 주체로서의 여성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후 아이슬란드는 성차별 관련 법제도를 개선하는 등 큰 변화를 이뤄냈다. 지난해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세계 성 격차 보고서 2017’에서 성 격차지수(GGI) 0.878을 기록하며 세계에서 가장 양성평등에 가까운 국가로 꼽히기도 했다.

사진='여성소비총파업 공식계정(@K_W_G_C_S)' 트위터 캡처

이에 배진경 한국여성노동자회 대표는 “아이슬란드 여성 총파업 당시 나라 전체가 멈춘 것처럼 한국에서도 소비 분야 파업을 시작으로 다양한 방식을 통해 여성노동자의 사회적 영향력을 각인시키려는 시도가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신혜지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