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 참석한 이용호 북한 외무상은 4일 “미국이 우리의 우려를 가셔줄 확고한 용의를 행동으로 보여주지 않는 한 우리만 일방적으로 움직이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충분한 신뢰 조성을 위해서는 반드시 쌍방의 동시적인 행동이 필수적”이라며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순차적으로 해나가는 단계적 방식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외무상은 싱가포르 엑스포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ARF에 참석해 이런 내용의 연설문을 읽어내렸다. 미국이 체제안전 보장 및 신뢰 구축의 초보적 조치인 종전선언에 응하지 않는 한 비핵화 조치를 이행하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으로 해석된다. 동시에 ‘행동 대 행동’의 원칙을 재확인했다.
이 외무상은 먼저 6·12 북·미 정상회담 공동성명을 거론하며 “만일 미국이 셋째와 넷째 조항만을 먼저 이행할 것을 주장하고, 우리는 첫째와 둘째 조항만을 먼저 이행할 것을 주장한다면 신뢰를 조성하기 힘을 것”이라며 “이행 그 자체가 난관에 부닥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공동성명은 새로운 북·미 관계 수립,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체제 구축,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미군 유해 발굴 및 송환 순으로 돼 있다. 북한은 6·25전쟁 때 전사한 미군 유해 55구를 송환함으로써 공동성명 이행의 첫 발을 먼저 뗀 상태다. 이 외무상은 “공동성명의 모든 조항을 균형적 동시적 단계적으로 이행해나가는 새로운 방식만이 유일한 방도”라고 강조했다.
이 외무상은 이어 “우려스러운 것은 미국 내에서 수뇌부의 의도와 달리 낡은 것에로 되돌아가려는 시도들이 짓궂게 계속 표출되고 있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우리가 핵실험과 미사일 실험 중지, 핵실험장 폐기 등 주동적으로 취한 선의의 조치에 대한 화담은커녕 미국에서는 오히려 우리나라에 대한 제재를 유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더 높아지고 있다”고 불만을 표출했다. 특히 종전선언을 ‘한반도 평화보장의 초보의 초보적 조치’라고 표현하면서 “종전선언 문제에서까지 후퇴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했다.
이 외무상은 “심지어 올해 9월에 맞이하는 공화국 창건 70돌 경축행사에 다른 나라들이 고위급 대표단을 보내지 말도록 압력을 가하는 온당치 못한 움직임까지 나타나고 있다”고 했다. 9·9절은 북한이 국가적 명절로 기념하는 날이다.
이 외무상은 “북·미 공동성명이 미국 국내 정치의 희생물이 되어 수뇌분들의 의도와 다른 역풍이 생겨나는 것을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미국의 건설적인 방안 제시 없이 북한이 먼저 움직이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쐐기를 박았다. 북한 대표단은 각국 취재진이 머무는 프레스센터를 찾아 A4용지 7장으로 된 연설문을 배포했다.
이 외무상의 ARF 연설은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지난달 3차 방북 직후 북한 외무성이 내놓은 성명의 연장선에 있다. 당시 외무성은 폼페이오 장관이 핵 프로그램 리스트와 비핵화 시간표 제출을 요구한 데 대해 “강도적”이라는 표현을 동원해 맹비난했었다.
싱가포르=권지혜 기자 jh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