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비핵화 실무협상을 맡았던 성 김 주필리핀 미국대사가 4일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이 열린 싱가포르에서 이용호 북한 외무상에게 서류 봉투를 건네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혔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트위터를 통해 이 외무상과 깜짝 회동한 사실을 전하며 “미국 대표단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친서에 대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회신을 보낼 기회를 가졌다”고 밝혔다. 김 대사가 이 외무상에게 전한 의문의 봉투가 트럼프 대통령의 친서임을 확인한 것이다.
폼페이오 장관과 이 외무상은 이날 오후 싱가포르 엑스포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ARF 리트리트(비공식 자유토론) 전 포토세션에서 마주쳤다. 폼페이오 장관이 먼저 이 외무상에게 다가가 악수를 건넸고 두 사람은 웃는 얼굴로 잠시 대화를 나눴다. 양 장관은 지난 3일 나란히 싱가포르에 입국했지만 이때까지 따로 접촉은 하지 않았다.
포토세션이 끝나고 김 대사는 이 외무상이 있는 자리로 다가가 자연스럽게 봉투를 건넸다. 당시 상황을 촬영한 영상을 보면 김 대사는 봉투를 건네면서 무엇인가 말을 전하고, 이 외무상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이 외무상은 김 대사의 봉투를 전달받고도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다. 북·미 간 사전에 친서 전달 과정이 조율됐다는 얘기다. ARF 리트리트가 시작되기 전 외교부 당국자는 기자들과 만나 “북·미 간 조우의 기회는 있을 것 같다”며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어느정도 운을 뗐다.
트럼프 대통령의 친서를 받아든 이 외무상 바로 옆에는 공교롭게도 왕이(王毅) 중국 외교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이 앉아 있었다. 왕이 부장과 이 외무상은 3일 북·중 외교장관 회담을 했다.
폼페이오 장관이 봉투 안에 든 내용물이 트럼프 대통령의 회신임을 확인하기 전까지 봉투가 밀봉돼 있지 않고 이 외무상이 이를 곧바로 열어봤다는 점에서 비핵화 협상을 진전시키기 위한 실무 자료라는 관측이 많았다.
ARF를 계기로 북·미 외교장관 회담이 정식으로 열리진 않았지만 양 정상이 친서를 주고받은 만큼 비핵화 협상에 물꼬가 트일지 주목된다. 미 국무부가 공개한 폼페이오 장관의 일정에 따르면 그는 ARF 리트리트 참석 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로 이동해 레트노 마르수디 외교장관과 회담한다.
싱가포르=권지혜 기자 jh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