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한반도를 비켜가고 있다. 올해 발생한 12개의 태풍 중 어느 하나도 한반도에 상륙하지 않았다. 제7호 태풍 쁘라삐룬만 제주도·부산 앞바다를 스쳐갔을 뿐이다.
피해를 줄여 다행으로만 여길 일은 아니다. 태풍은 바람을 일으켜 더위를 식히고 비를 뿌려 가문 땅을 적시는 기상현상이다. 계속되는 폭염 속에서 한반도로 찾아오지 않는 태풍을 서운한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태풍의 코리아 패싱’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북상하던 제12호 태풍 종다리는 일본에서 유턴해 남쪽으로 내려갔다. 기상청은 30일 “제25호 열대저압부가 오전 3시 현재 일본 가고시마 서북서쪽 약 90㎞ 해상에서 남서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열대저압부는 하루 전까지 종다리였다. 일본 내륙에서 세력이 약해졌다.
종다리는 사실상 소멸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세계기상기구(WMO)는 열대저기압을 중심 최대 풍속에 따라 ▲태풍(33m/s 이상) ▲강한 열대폭풍(25~32m/s) ▲열대폭풍(17~24m/s) ▲열대저압부(17m/s 미만)의 네 등급으로 분류하고 있다. 태풍으로 인정되는 등급은 열대폭풍까지다. 가장 낮은 등급인 열대저압부는 태풍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종다리는 지난 25일 괌 북서쪽 1110㎞ 해상에서 발생해 태평양의 습기를 먹고 북진했다. 일본의 허리를 관통하고 동해에 진출할 것으로 예상됐지만 돌연 방향을 서쪽으로 틀었다. 지금은 일본 남해상으로 내려갔다. 예상 경로에 있던 제주도 동부를 스치지도 않았다.
처음이 아니다. 올해 발생한 태풍 12개 중 9개는 한반도 쪽으로 다가오지도 않았다. 한반도행을 가장 먼저 예약했던 쁘라삐룬은 지난달 29일 필리핀 동쪽 해상에서 출발해 대한해협을 아슬아슬하게 관통하고 지난 4일 동해에서 사라졌다. 제주도와 영남권에 하루씩 비를 뿌렸지만 그 이상으로 한반도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기상청은 쁘라삐룬을 ‘상륙 태풍’으로 기록하지 않았다.
제10호 태풍 암필은 지난 18일 필리핀 동쪽 해상에서 발생, 북동진 중 방향을 살짝 틀어 한반도 쪽으로 다가오는 듯 했지만 결국 중국 서부로 들어가 지난 24일 내륙에서 소멸됐다. 후속주자로 달려오던 종다리마저 한반도 진입 목전에서 힘을 잃고 튕겨나갔다.
상륙 태풍으로 기상청에 기록된 마지막 사례는 2016년 10월 부산·울산 앞바다를 지나간 차바(18호). 이 태풍도 쁘라삐룬과 비슷한 경로로 이동해 한반도 동남부를 스쳤을 뿐 내륙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최대 풍속 49.0 m/s의 강력한 바람을 몰아쳐 8500억원에 이르는 재산피해를 냈다.
한반도 상륙 태풍은 6년째 나타나지 않고 있다. 2012년 9월 경남 통영으로 상륙한 산바(16호)가 마지막이었다. 이 태풍은 통영에서 내륙으로 북동진해 동해로 빠져나갔다. 중심기압이 890hPa까지 떨어져 그해 가장 강력했던 태풍으로 기록됐다. 중심부에서 930hPa 이하로 측정된 열대저기압은 매우 강한 태풍으로 평가된다.
태풍의 ‘코리아 패싱’은 폭염과 무관하지 않다. 최근 한반도에 폭염을 몰고 온 고기압은 태풍의 이동 경로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요소다. 쁘라삐룬, 암필, 종다리 역시 한반도의 고기압을 뚫지 못하고 방향을 틀었다. 태풍이 더위를 식히기는커녕 태평양의 습기만 밀어올리고 떠난 탓에 한반도는 고온다습한 날씨를 유지하고 있다.
강남영 국가태풍센터 분석관은 “태풍의 이동 경로에 복잡한 요인들이 작용하지만, 최근의 사례는 고기압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며 “올해 태풍은 평년과 비슷하거나 다소 적게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