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이 말하는 ‘행복의 나라’란 어떤 곳일까. 명량 쾌활한 그 무엇을 상상했다면 적잖이 당황할지 모르겠다. 발랄한 제목이 무색하게도 이 영화는 시종 어둡고 무겁다. 진정한 행복을 찾아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 뚜벅뚜벅 채워낸 그 여정에서 도무지 흩어지지 않은 뚝심이 느껴진다.
영화 ‘행복의 나라’의 주인공은 민수(지용석). 지하철 철로에 몸을 던진 그는 자신을 구하고 대신 세상을 떠난 진우의 제사에 매년 참석한다. 진우의 엄마 희자(예수정)는 민수를 친아들마냥 살뜰히 챙기지만 그는 오히려 불편하다. 모든 걸 떨쳐내고 싶어진 민수는 더 이상 제사에 오지 않겠다고 선언하는데, 그 순간 희자의 표정은 싸늘하게 식는다.
죄의식에 대한 묵직한 성찰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쉽사리 선과 악을 구분 지을 수 없는 인간 본성에 대한 물음도 끄집어낸다. 제22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한국 장편 경쟁부문에 초청된 영화는 작품상과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이를 가능케 한 건 두 청춘의 열정이었다. 배우 지용석(34)과 정민규(35) 감독을 최근 서울 서대문구 한 카페에서 만났다.
-감독님이 수년 전부터 준비해 온 시나리오라고 들었다. ‘행복의 나라’를 관객에게 선보인 소감은.
정 감독: “마냥 기분이 좋지만은 않네요. 이제 ‘행복의 나라’와는 정말 끝이니까요. 지금까지 치열하게 매달려 왔는데, 이제 더 이상의 무언가는 없는 거니까. 되게 시원섭섭해요. 제 안에 꽉 차 있던 이 작품이 조금씩 없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도, 비워야 또 다음이 있는 거겠죠.”
-작품을 구상하게 된 배경은 어떻게 되나. 2001년 일본 지하철 선로에 추락한 취객을 구하려다 숨진 의인 고(故) 이수현씨 일화가 떠오르기도 하는데.
정 감독: “지하철역에 스크린 도어가 설치되지 않았던 시절에 그 공간에 들어서면 항상 이상한 느낌이 들었어요. 자주 가는데도 매번 낯선 공간처럼 느껴졌죠. 여러 사고가 나기도 하는 공간인데, 그런 사고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더라고요. 그들은 지금 어떻게 살아갈까. 근데 시나리오 쓰기가 어려워서 중단하고 5년 정도가 걸렸던 것 같아요. 그러다 (지)용석이를 만나 의기투합했죠. 제작될 수 있겠다는 희망을 얻었어요.”
지용석: “처음에는 몇몇 단어랑 장면의 조각들만 나열돼 있는 상태였어요. 그걸 토대로 이야기를 구성해나가는 게 미션이었죠. 함께 하다 보니 2~3주 안에 시나리오가 완성됐어요.”(*지용석은 이 영화의 주연이자 제작자다. 독립영화 제작을 꿈꿔 온 그가 설립한 영화제작사 무다필름의 첫 번째 작품이 ‘행복의 나라’이다.)
-민수라는 온통 우울감에 휩싸여 있는 인물이다. 설득력 있게 그려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그럼에도 이 인물에 끌린 이유는.
지용석: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다 누군가에 의해 원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된 남자인데, 이상하게도 평범한 가정을 꾸린 채 살고 있잖아요. 아내도, 아이도, 직장도, 집도 있죠. 누군가에게는 완벽해보일 수 있는 행복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데 정작 그는 불행해요. 저에게도 그런 지점이 있었거든요. 민수와 제가 얼마간 닮아있는 지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공감이 됐죠.”
-영화는 민수가 고통의 구렁텅이에 빠지기까지의 전사(前史)를 아예 생략해버린다. 그렇게 극을 구성한 이유는.
정 감독: “이렇기 때문에 민수가 죽으려 하는 것이다, 라는 명제를 줘버리면 오히려 (영화를 자유롭게 감상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규정짓고 싶지 않았어요. 궁금증으로 시작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싶었죠.”
-전사가 없는 상태에서 캐릭터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배우로서는 녹록지 않았겠다.
지용석: “어려웠어요. 더구나 하루 온종일 캐릭터에 이입해 있어야 해서 더욱 그랬죠. 그러다가 아예 민수가 되려고 노력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한 달 동안 경상도 강원도 등을 돌며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어요. 처음에는 민수의 전사를 적어보기도 했어요. 근데 1~2주 지나니 흥미가 없어지더라고요. ‘민수는 어떤 사람이다’라고 설정하고 분석하기보다 내가 오롯이 민수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보기로 했죠. 감독님이 민수의 삶에 대해 자서전도 써보라고 하셨어요.”
-자서전을 쓰게 한 이유는 무엇인가.
정 감독: “저 역시도 민수를 용석이화 시키는 작업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어느 정도 맞닿아있는 지점도 있었고 상반된 것도 있었죠. 용석이는 홀로 외로움과 싸우면서 본인이 느낀 감정들을 체득해가고 있었어요. 저는 그 과정을 다 지켜봤고요. 그래서 이렇게 좋은 연기가 나오지 않았나 싶어요. 쉽지 않았을 텐데 정말 훌륭하게 소화했어요. 촬영하면서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 힘들었을 텐데 여러 악조건들을 끊임없이 돌파해 나갔죠.”
-영화를 보면서 궁금했던 것 하나. 8년 동안 아들 제사에 민수를 부른 희자는 그에게 나름의 벌을 주고 있었던 걸까.
지용석: “이중적인 거죠. 용서하고 싶고 그래야 할 것도 같은데, 자기도 모르게 자꾸만 원망이 드러나게 되는 거예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성이 그런 게 아닌가 싶어요. 바로 그게 우리의 출발점이었거든요. 민수도 마찬가지예요. 희자 가족에게 미안함을 가지고 있지만 그만 좀 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거죠.”
-희자는 결국 민수를 용서하지 않은 걸까.
정 감독: “이 영화를 만들면서 ‘용서’라는 단어를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희자는 그보다 상위의 복잡한 감정을 갖고 있죠. 내 아들이 목숨을 바쳐 살려낸 민수에게 정말 친아들처럼 정을 주려고 노력하지만, 이따금씩 아들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드는 거죠. 마지막에는 결국 모든 것이 허탈해진 거예요. 아들도 민수도, 아무것도 남은 게 없다는 허탈감. 후회나 배신감을 느꼈을 순 있겠지만, 복수라는 감정은 없었던 것 같아요.”
-두 사람 모두에게 ‘행복의 나라’는 남다른 의미를 지니는 작품일 듯하다. 정민규 감독에게는 장편 연출 데뷔작, 지용석 배우에게는 제작자로서 처음 선보이는 작품이니.
정 감독: “이 작품의 준비부터 마무리까지 용석이와 하나가 됐었던 것 같아요. 정말 영화만 보고 함께 달려왔죠. 많은 부분에서 서로 의견이 일치해 수월하게 작업을 진행해 나갔죠. 그때만큼은 ‘각자’의 의미가 아니었어요. 한 명이 힘들어 하면 다른 한 명도 동화가 될 정도였으니까. 이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본 것 같아요.”
지용석: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최선을 다했어요. 크랭크업한지 2년이 지났는데, 그동안은 깜깜한 시간을 지나온 것 같아요.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함께 또 다른 작품을 준비하게 된다면, 똑같이 최선을 다해야죠. ‘행복의 나라’는 배우를 떠나 인생에 대해 많이 배우게 해준 영화가 아닌가 싶어요. 행복부터 고통까지 여러 기억들이 담겨 있어요.”
정 감독: “용석이는 제게 잊을 수 없는 첫 장편영화를 실현시켜준 사람이에요. 이것으로 용기를 얻어 또 앞으로 나아가야죠. 용석이도 무다필름 대표로서, 배우로서 탄탄한 길을 걸어 나갔으면 좋겠어요. ‘행복의 나라’를 통해 버틸 수 있는 있는 힘을 얻은 것 같아요. 힘들어도 조금 더 해보자는 열정 같은 거요.”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