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고(故)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가 투신해 숨진 지난 23일, 당이 일부 공개한 유서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노 원내대표는 드루킹 측으로부터 돈은 받았지만 청탁과 대가가 없었다는 취지의 글을 남겼다. 그는 2016년 총선을 앞두고 ‘댓글조작 사건’ 주범인 김동원(49·필명 드루킹)씨 일당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 약 5000만원을 수수한 의혹을 받아왔다.
노 원내대표는 사고 전 3박5일 일정으로 미국을 다녀왔다. 동행한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사망소식을 전해 들은 뒤 “일정 마지막 날 밤, 옛날을 회고하면서 정말 즐거운 마음으로 자정 가까이 자리를 함께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술을 대접한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노 원내대표는 사고 당일 오전 9시30분부터 제93차 당 상무위원회에 참석하기로 돼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오전 9시38분쯤 서울 중구의 한 아파트 앞 현관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갑작스러운 비보였다.
◇예기치 못했던 죽음… 남겨진 자필유서
노 원내대표의 시신은 아파트 경비원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이 아파트는 노 원내대표 자택이 아니라 어머니와 남동생 가족이 사는 곳으로 확인됐다. 아파트 17층~18층 계단참에서 노 원내대표의 외투, 지갑, 신분증, 정의당 명함, 유서 등이 발견됐다. 경찰은 “유서가 자필로 작성된 것이 맞고, 사망 경위에 의혹이 없어 시신 부검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정의당은 이날 오후 3시 긴급회의를 연 끝에 노 원내대표의 유서 일부를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노 원내대표는 유서에 “2016년 3월 두 차례에 걸쳐 경공모로부터 모두 4천만원을 받았다. 어떤 청탁도 없었고 대가를 약속한 바도 없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다수 회원들의 자발적 모금이었기에 마땅히 정상적인 후원절차를 밟아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누굴 원망하랴.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며 부끄러운 판단이었다. 책임을 져야 한다”고 썼다. 또 “어렵게 여기까지 온 당의 앞길에 큰 누를 끼쳤다”며 “잘못이 크고 책임이 무겁다. 법정형으로도 당의 징계로도 부족하다”고 했다.
노 원내대표는 투신 전날 모친이 입원 중인 서울 강남의 한 종합병원을 방문했다고 한다. 유족 관계자는 “(노 원내대표가) 바빠도 2주에 한 번은 (병원을) 찾았고 연락하면 바빠도 오셨다”고 말했다. 다른 유족은 “(투신) 소식을 뉴스를 보고 알았다”면서 “(사고 전) 의미심장한 말은 없었다”고 했다.
◇사회각계서 애도물결… 많은 이 울린 유시민의 눈물
정치권은 큰 슬픔에 잠겼다. 한국당·더불어민주당·바른미래당 모두 논평을 내고 노 원내대표를 추모했다. 청와대는 문재인 대통령이 국민청원에 직접 답변하기로 했던 일정을 취소했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오늘 아침 가슴 아픈 일이 있었다”면서 “노 원내대표, 편히 쉬시길 빌겠다”고 애도했다.
노 원내대표의 빈소가 마련됐던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도 사회 각계 인사들의 조문이 끊이지 않았다. 그의 오랜 ‘정치적 동지’ 유시민 작가는 빈소가 차려진 첫날 밤 침통한 표정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노 원내대표의 영정을 마주한 뒤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며 오열했다. 이어 이정미 정의당 대표, 심상정 의원의 손을 차례로 잡고 다독였다. 유 작가의 눈물은 다음 날 오전 내내 포털사이트 검색어 순위에 오를 정도로 화제가 됐다.
유 작가는 26일 열린 노 원내대표 추모제에서 추도사를 낭독했다. 그는 “추도사가 아니고, 노회찬 대표님께 짤막한 편지를 하나 써왔다”며 “다음 생에는 더 좋은 곳에서 태어나세요. 잘가요, 회찬이 형”이라고 말했다.
정의당 전 대표이기도 했던 심상정 의원은 첫날 빈소를 지킨 뒤 페이스북에 “억장이 무너져 내린 하루가 그렇게 갔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심 의원 역시 추모식에 참석해 “여러분께서 많이 사랑하시고 정말 멋진 정치 의회 지도자 노회찬을 지키지 못해 정말 죄송하다”며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수많은 번뇌의 나날을, 날밤을 지새웠을 노 전 원내대표님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진다”고 흐느꼈다.
이밖에도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 손석희 앵커, 서지현 검사, 방송인 김구라씨 등이 빈소를 찾아 고인을 추모했다. 김씨는 노 전 원내대표가 생전 고정패널로 출연했던 JTBC ‘썰전’에서 함께 호흡을 맞췄다. 다음은 고인을 조문한 각계 인사들 사진.
◇모란공원에 잠든 노회찬… 영결식, 국회장으로 엄수
노 원내대표의 영결식은 27일 국회 앞 잔디밭에서 국회장으로 엄수됐다. 영결식은 유인태 국회 사무총장의 약력 보고, 문희상 국회의장의 영결사, 이정미 정의당 대표와 심 의원의 조사, 유족 인사, 헌화, 분향 등 순서로 약 1시간 동안 진행됐다. 약 1000명의 시민이 영결식에 참석해 고인의 마지막을 함께했다. 노 원내대표의 생전 영상이 상영됐을 때는 영결식장 곳곳에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노 원내대표의 위패와 유골은 영결식이 끝난 뒤인 오후 4시쯤 경기도 남양주 모란공원에 도착했다. 안장식은 오후 4시17분쯤부터 시작됐다. 부인 김지선씨가 취토했고, 이 대표와 심 의원도 유골함 위에 흙 한 줌을 올렸다. 조문객들은 정의당을 상징하는 색깔인 ‘노란 국화꽃’을 들고 헌화했다. 노 원내대표 묘역 근처에는 전태일 열사, 문익환 목사 등의 묘역이 있다.
박은주 기자 wn1247@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