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임 시절 법원행정처가 2016년 부산지역 건설업자의 뇌물 사건 항소심에 직접 개입하기 위해 고영한 당시 행정처장에게 ‘말씀 자료’까지 작성해 보고한 것으로 25일 확인됐다. 현직 대법관인 고 전 처장까지 ‘사법 농단’에 깊숙이 개입한 직접적인 정황이 드러난 것이다.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부장검사 신봉수)는 행정처, 임종헌 전 행정처 차장 등으로부터 최근 ‘문모 판사 관련 리스크 검토’라는 제목의 문건을 확보해 이 같은 내용이 담겨 있는 것을 파악했다. 이 문건은 임 전 차장을 거쳐 그 윗선에 보고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고 전 처장이 윤모 당시 부산고법원장에게 말씀자료 내용을 직접 구두로 전달해 재판에 개입했다고 의심한다. 이 말씀자료 내용은 문어체가 아닌 구어체 형식으로 돼 있다. ‘문 판사가 재판 정보를 외부로 유출해 항소심 변론 재개가 불가피 합니다’는 식이다. 검찰은 이를 사실상 고 전 처장이 당시 윤 부산고법원장에게 읽어준 ‘대본’이라고 본다.
앞서 행정처 윤리감사관실은 2016년 9월 문제의 ‘리스크 검토 문건’을 작성했다. 부산지역 건설업자 정모씨로부터 접대 받은 의혹이 있는 부산고법 문 판사가 정씨의 1·2심 관련 정보를 외부로 유출하고 있다는 내용과 이를 ‘조용히’ 해결할 방안이 담겼다. 정씨는 당시 조현오 전 경찰청장에게 5000만원의 뇌물을 건넨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1심은 무죄가 나왔고 문건이 작성된 시점에는 항소심 진행 중이었다.
행정처는 문건에서 “항소심에서도 무죄가 선고될 경우 검찰 등이 문 판사의 비위 사실을 외부로 유출할 우려가 있다” “종결된 변론을 직권으로 재개하고 1~2회 더 항소심 공판을 진행할 필요가 있다”는 등 방안을 제시했고 이는 실제로 이행됐다. 항소심은 정씨에게 징역 8개월을 선고했다.
검찰은 ‘말씀자료’ 내용 및 항소심 절차 분석 결과 행정처의 재판개입 정황이 뚜렷하다고 보고 있다. 문건에는 “법원 감사위원회에 문 판사 건이 회부되면 관련 사실이 외부로 유출 된다” “문 판사에게 행정처의 비위 인지 사실을 알려 주의를 줬다”는 등의 내용도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법관을 관리·감독하는 행정처 윤리감사관실의 직무유기 정황도 명백하다는 게 검찰 판단이다.
검찰은 임 전 차장 등에 대한 하드디스크 ‘이미징(복사)’ 과정에서 이 문건을 발견했지만 행정처는 당초 “사건 관련성이 없다”며 검찰 제출에 소극적이었다고 한다. 행정처는 또 법관 인사자료, 전·현직 행정저 관계자 이메일, 메신저 내용도 현재로서는 제출할 의사가 없다고 검찰에 통보했다. 행정처는 “적법 절차에 따라 검찰의 수사에 협조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검찰은 양 전 대법원장과 박 전 처장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지난 20일에 이어 지난 24일 재차 청구했지만 기각됐다. 허경호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양 전 대법원장, 박 전 처장이 임 전 차장과 공모했다는 점에 대한 소명이 부족하다”고 밝혔다.
문동성 기자 theMo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