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된 삼겹살 불판 갈아야” ‘진보정치 대중화’ 앞장 선 노회찬

입력 2018-07-23 14:29


23일 서울 중구 자택에서 투신해 사망한 노회찬 정의당 의원은 한국 진보정치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학생운동을 거쳐 노동운동으로 잔뼈가 굵은 그는 제도권에 입성한 이후에도 뛰어난 정치감각과 촌철살인의 입담을 통해 진보정치의 ‘투사’ 이미지를 바꾼 스타였다. 특히 삼성으로부터 ‘떡값’을 받은 정치검사들의 명단을 폭로한 ‘X파일’ 사건 등을 통해 국회에서 맹활약했을뿐 아니라 ‘삼겹살 불판을 갈아야 한다’ 등의 친근한 화법으로 국민들의 정서를 대변했던 정치인이었다.

◇‘학출’ 노동운동가에서 진보정치인으로

1956년 부산에서 태어난 노 의원은 경기고등학교 재학 시절부터 유신 반대투쟁에 참여하는 등 사회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그와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던 황교안 전 국무총리가 경기고 동기다. 고려대 2학년이던 1980년 발생한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참상을 목격한 노 대표는 용접공 자격증을 따 공장에 취직한 이른바 ‘학출’(학생운동 출신)로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이후 1987년 6월 항쟁 이후 인천·부천지역 노동조합 단체들을 규합해 인천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을 출범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90년대초 구소련과 사회주의권이 몰락하면서 노 원내대표는 인생의 중대한 전환점을 맞게 된다. 인민노련은 ‘노동자 계급의 정치세력화’를 위해 제도권에서의 합법적인 정치활동을 선언하게 되고, 노 대표는 진보정당추진위원회 대표를 맡는다. 이후 그는 진보정치세력의 핵심인물로 활동하면서 1997년 대선 국면에서 권영길 당시 민주노총 위원장을 주축으로 한 국민승리21을 지원했다.

대선 패배 이후 절치부심하던 진보정치세력들은 2000년 민주노동당을 출범시키며 또한번 도약의 계기를 마련했다. TV토론의 중요성이 커지던 시기, 노 원내대표는 귀에 쏙쏙 박히는 촌철살인의 어법으로 단숨에 진보정치 스타로 인지도를 끌어올렸다. 그는 2004년 17대 총선을 앞두고 열린 한 토론에서 “50년 동안 삼겹살을 같은 불판 위에서 구워먹으면 고기가 새카맣게 타버린다. 이제 불판을 바꿔야 한다”고 말해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은 10석을 확보하며 단숨에 원내 제3당에 올랐고, 노 의원도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했다.

◇원내에서 맹활약…진보정치 각인시켜

국회에 함께 입성했던 민주노동당 인사들이 기존 운동권의 벽을 넘지 못했던 것에 비해 노 의원은 촌철살인 화법뿐 아니라 원내에서의 활약으로 진보정치인으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대표적인 것이 2005년 8월 ‘삼성 X파일’에 등장한 ‘떡값 검사’ 명단을 폭로한 사건이다. 이 파일에는 1997년 안기부(현 국가정보원) 도청 전담팀인 미림팀이 이학수 당시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장과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 간 대화 내용을 불법 도청한 것이다. 대화에는 삼성이 대선 후보들에게 불법 대선자금을 제공하고, 검사들에게 ‘떡값’ 명목의 불법 자금을 건넨 내용도 포함됐다. 당초 MBC 이상호 기자가 처음 폭로한 뒤 노 의원은 떡값을 받은 검사 7명의 명단을 공개했다.

하지만 당시 특검은 이건희 삼성 회장을 서면조사하고 사건을 마무리했고, 삼성 측 인사들을 모두 불기소 처분했다. 반면 검사 실명을 공개한 노 의원은 이후 명예훼손과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선 유죄, 2심에선 무죄 판결을 받은 뒤 2013년 대법원으로부터 최종 유죄 판결을 받고 의원직을 상실했다.

당시 노 의원은 “건국 이래 최대 정·경·검·언 유착 사건에서 뇌물을 준 사람과 뇌물을 받은 사람 그 누구도 기소되거나 처벌받지 않았다”며 사법부를 강도높게 비판했다. 하지만 2016년 20대 총선에서 경남 창원 성산구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3선에 성공했다.

국회 안팎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던 그는 뜻밖에 ‘드루킹 악재’가 터지면서 의혹에 휘말렸다. 드루킹 김모씨가 노 의원에게 불법자금 5000만원을 건넸다는 의혹은 2016년 당시 검찰에서 무혐의 처분됐던 사건이지만 최근 허익범 특검팀이 이 사건을 원점에서 재수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노 의원은 “어떠한 불법적인 정치자금을 받은 적이 없다. 특검이 조사를 한다고 하니, 성실하고 당당하게 임해서 진실을 밝히겠다”며 의지를 보였지만 끝내 비극적 결말을 택했다. 그의 유서엔 “드루킹 측으로부터 금전을 받은 사실이 있으나 청탁과는 무관하다”고 적힌 것으로 알려졌다.

백상진 기자 shark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