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주인은 나”… 워라밸 실천하는 직장인들

입력 2018-07-21 10:50

경기도 용인에 사는 직장인 김모(28·여)씨는 요즘 남편과 함께 집 근처 학원에 들러 요가 배우는 재미에 푹 빠졌다. 김씨가 요가를 배우는 사이 남편 김모(32)씨는 헬스를 한다. 학원을 다닌 지 아직 3주도 안 돼 많이 서툴지만 자기계발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마냥 즐겁다. 김씨는 "같이 수업을 듣는 수강생 20명 중 절반 이상이 직장인"이라고 했다. 수도권의 한 공공기관에서 근무하는 황모(31)씨는 '칼퇴'(정시퇴근) 후 부인과 두 살배기 아들을 위해 요리하는 날이 늘었다.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다. 황씨는 "야근이 잦고 퇴근시간이 들쑥날쑥해 평일에는 좀처럼 가족과 함께 식사하기가 어려웠다"며 "이제는 장을 보고 내가 만든 음식 사진을 SNS에 올리는 게 새로운 취미"라고 말했다.

주 52시간 근무제는 소비 트렌드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시간·체력 등의 이유로 여가활동과 자기계발을 사실상 포기했던 젊은 직장인들이 강좌 등록과 제품 구매에 지갑을 열기 시작했다. 현대백화점이 전국 15개 점포 문화센터의 ‘2018년 여름학기 강좌’를 신청한 고객을 분석한 결과 20, 30대 직장인 비중이 25.7%를 차지했다. 지난해와 비교해 두 배(13.1%)가량 증가했다. 큐레이션 종합 쇼핑몰 G9(지구)에 따르면 지난 1일부터 15일까지 성인용 인라인스케이트와 스포츠장갑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각각 500%, 220% 더 팔렸다.

전문가들은 한목소리로 “20, 30대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삶의 질과 건강 등 자신을 최우선시한 소비가 점차 늘고 고착화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칼퇴라는 개념이 아직은 낯선 기성세대보다는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일과 삶의 균형)을 추구하는 젊은층이 소비의 주축이 될 것이란 의미다.

스포츠·골프 관련 매출 껑충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과 함께 여성 소비 파워가 스포츠 시장에서 더욱 두드러질 것으로 보인다. 현대백화점은 “2018 여름학기 강좌를 신청한 20, 30대 고객 25.7% 중 70%가 여성”이라고 밝혔다. 현대백화점은 여름학기 강좌에서 발레·요가·피트니스 등을 제공하고 있다. 김민정 숙명여대 소비자경제학과 교수는 “20, 30대 여성의 경우 이미 워라밸과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추구하는 소비 패턴을 보였다”며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과 함께 이런 경향은 더 확대될 것”이라고 말했다.

백화점은 일찌감치 변화의 조짐을 포착하고 고객 잡기에 나섰다. 롯데백화점이 지난 6월 1일부터 7월 15일까지의 애슬레저(애슬레틱과 레저의 합성어로 일상에서 입을 수 있는 운동복) 상품군 매출을 분석한 결과 전년 동기 대비 5.5% 늘었다. 이슬기 롯데백화점 애슬레저부문 치프바이어는 “최근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과 함께 요가·필라테스 관련 제품 수요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롯데백화점은 2018 F/W(가을·겨울) 매장 개편 때 다양한 애슬레저룩 브랜드를 선보일 계획이다. 신세계백화점은 지난 13일부터 아보카도·안다르·뮬라웨어·나이키 등 유명 피트니스·스포츠 브랜드들과 손잡고 오는 29일까지 서울 서초구 강남점과 경기도 의정부점 등에서 ‘피트니스 페어’를 연다. 현대백화점 역시 지난 3일부터 서울 강남구 무역센터점 6층에 애슬레저 전문 멀티숍 ‘더 바디 디자인’을 열고 고객맞이에 한창이다.

스포츠·골프 상품군 매출 역시 성장세다. 같은 기간 백화점 3사(롯데·신세계·현대)의 스포츠·골프 상품군 평균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각각 13.4%, 6.7% 성장했다. 20, 30대를 타깃으로 한 골프 의류 브랜드의 매출 증가세가 특히 눈에 띄었다. 롯데백화점은 17일 “제이린드버그·엘피지에이 골프·데상트 골프의 경우 지난해보다 매출이 20% 이상 뛰었다”고 밝혔다. 여준상 동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절대적으로 시간적 여유가 생긴 직장인들이 실내 활동보다는 실외 활동 비중을 늘리면서 생긴 결과”라고 분석했다.


외식 말고 집밥

주방도 북적인다. 가족과 함께 식사할 여유가 생긴 직장인들이 신선식품 구매에 나섰기 때문이다. 모바일 커머스 티몬이 지난 1일부터 15일까지 자사 생필품 매장 ‘슈퍼마트’의 매출을 분석한 결과 신선식품 매출 상승폭이 뚜렷했다.

특히 쌀과 잡곡류의 성장세가 두드러졌다. 전년 동기 대비 381%나 증가했다. 과일·채소류는 142%, 수산·축산물류는 103% 상승하며 세 자릿수 상승률을 보였다. 집에서 요리하는 데 꼭 필요한 오일·소스·조미료·장류 매출도 115% 오르며 ‘집밥 열풍’을 뒷받침했다.

반면 뷔페 또는 레스토랑 등에서 사용할 수 있는 e쿠폰 판매량은 감소한 것으로 집계됐다. G9는 “분석 결과 지난 1일부터 15일까지 판매된 e쿠폰은 지난해보다 13% 줄었다”고 했다. 여가시간이 생기면서 외식 대신 집밥을 선택한 것으로 해석된다.

DIY(직접 제작)도 증가

이른 퇴근으로 집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늘며 직장인들 사이에 ‘내 집 꾸미기’도 인기다. 특히 DIY 가구·소품이 소비자들로부터 각광을 받는다.

관련 매출도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티몬 관계자는 “지난 1일부터 15일까지 DIY 가구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313% 증가했다”고 설명했다. 인테리어 소품군 매출도 45% 늘었다.

서울의 한 대학에서 교직원으로 근무하는 김모(50·여)씨는 지난 14일 가족과 함께 이케아 광명점을 찾아 7만원을 주고 조명갓·전구·전선 등을 구매했다. 침대 머리맡에 놓을 조명을 직접 만들기 위해서다. 김씨는 “작은 대학이라 업무가 많아 내 집 꾸미기에 소홀했는데 지금이라도 본격적으로 해볼 생각”이라고 했다.

여 교수는 “과거보다 시간적 여유가 생기고 ‘내 삶의 주인은 나’라는 인식이 강해지는 탓에 앞으로 소비자들은 무언가를 스스로 만드는 DIY를 더 중시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손재호 기자 sayh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