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이 재임 시절 국가정보원장들에게서 상납 받은 특수활동비는 “뇌물로 볼 수 없다”고 법원이 판단했다. 이 같은 결과를 두고 법조계에서는 “예고된 수순”이라는 반응이 나온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2부(부장판사 성창호)는 20일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수수 및 국고손실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박 전 대통령에게 합계 징역 6년에 33억원을 추징한다고 선고했다. 33억원 상당 액수를 국고에 반환할 것도 명령했다. 이어진 공천개입 혐의(공직선거법 위반)의 선고 공판에서는 징역 2년이 선고됐다.
박 전 대통령은 2013년 5월~2016년 9월 당시 남재준 이병기 이병호 국정원장으로부터 매월 5000만~1억원씩 총 35억원의 특활비를 수수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재판부는 이날 박 전 대통령의 국고손실 혐의를 유죄로 인정했지만 뇌물수수 혐의는 무죄라고 판단했다. 재판을 진행한 성창호 부장판사는 지난달 15일 열렸던 남 전 국정원장 등에 대한 국정원 특활비 상납 선고공판에서도 같은 취지로 판단했다.
당시 성 부장판사는 “대통령과 국정원장은 긴밀하게 협조할 수밖에 없는 관계고, 국정원장이 대통령에게 금품을 지급해 각종 편의를 기대할 수 있는지 의문”이라며 남 전 원장 등 3인의 뇌물공여죄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이날 선고 공판에서도 성 부장판사의 판단은 같았다. 재판부는 “박 전 대통령과 당시 국정원장들 사이와 같은 공무원 상·하급자 관계에서 뇌물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직무와 관련된 대가를 바라고 금품이 전달돼야 한다”며 “당시 국정원장들이 먼저 특활비 지급을 검토한 것으로 보이지 않고, 박 전 대통령이 특별한 계기 없이 단순히 청와대에 국정원 예산을 지원해달라는 지시에 따라 수동적으로 준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같은 사건을 이어서 맡은 재판부가 뇌물공여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이미 판단한 만큼 이에 상응하는 뇌물수수죄 성립도 당연히 불가능해진다는 법조계 전반의 예측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다.
재판부는 구체적으로는 “남 전 원장 등이 국정원장 임명에 관련된 보답으로 특활비를 줬다고 보기도 어렵다”며 “특활비를 지급해야 할만한 당시 국정원 현안이 있었다는 증거가 없고, 오히려 특활비를 지원했는데도 청와대와 마찰을 빚는 등 문제가 있었다”며 무죄 선고의 이유를 밝혔다.
다만 국고손실 혐의에 대한 박 전 대통령의 유죄는 인정됐다. 재판부는 “박 전 대통령은 국정을 총괄하는 대통령으로서 국가 예산을 용도에 맞게 엄정 집행할 자리에 있었다”며 “3년에 걸쳐 30여억원에 이르는 특활비를 받아 사저 관리, 본인 의상실 유지 등 사적 목적으로 사용해 국고를 손실했다는 점에서 비난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이어 재판부는 “국정원 예산이 본연의 목적인 국가안전보장에 사용되지 못해 국가와 국민의 안전에도 위험이 초래됐다”며 “피고인에게 이에 상응하는 엄중한 처벌이 필요하다”고 질타했다.
이날 재판부는 박 전 대통령이 2016년 9월 당시 이병호 원장으로부터 받은 특활비 2억원에 대해서는 국고손실 등의 공모관계 증거가 없다고 보고, 수수한 총액 35억원 중 33억원에 대해서만 국고손실 혐의를 적용했다.
검찰 관계자는 선고 직후 즉각 항소 의사를 밝혔다. 검찰은 “조윤선 안봉근 등 대통령을 단순 보조하는 비서실 직원이 국정원장에게 받은 소액의 돈은 뇌물이라면서 대통령 본인이 직접 국정원장으로부터 받은 수십억원의 돈은 대가성이 없어 뇌물이 아니라는 1심 선고를 수긍하기 어렵다”고 반박했다.
구자창 기자 critic@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