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사회적 대화 기구인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노사정 위원회)가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로 명칭과 기능이 변경돼 공식 출범했다. 경사노위는 사회안전망 구축, 4차 산업혁명 대응, 산업 안전 대책, 법·제도 개선까지 범위를 넓혀 경영자와 노조, 정·관계가 함께하는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려 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노동 정책 멘토 중 한명인 문성현(66) 경사노위 위원장은 이같은 막중한 업무를 수행해야 한다. 1999년 민주노총의 노사정위 탈퇴를 이끌었던 ‘문전투’ 문 위원장의 아이러니한 운명이다. 그리고 그는 취임 1년도 안 돼 경사노위로의 재출범을 이끌어냈다.
노동 정상화는 문재인정부의 핵심 과제 중 하나다. 문재인정부의 경제 정책은 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 공정경제라는 세 축으로 구성됐다. 소득주도성장을 위해선 노조의 희생이, 혁신성장을 위해선 노조의 동참이 필요하다. 각급 노조는 공정경제 생태계 조성에도 앞장서야 한다.
그렇다고 문 대통령이 노조에 너그러운 것은 아니다. 지난해 한상균 전 민주노총 위원장의 사면 여부를 두고 민주노총과 실랑이를 벌일 때도, 청와대는 결국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권 출범 직후부터 청와대 내부에서는 “노조도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도록 반성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지속돼왔다.
이제 집권 2년차를 맞아 사회적 대타협을 모색하는 정부의 중심에 문 위원장이 있다. 그는 최저임금 인상과 같은 당면한 현안에서부터 역할을 요구받고 있다. 지난 5월 그를 경노사위 위원장실에서 만났다. 그의 구상에는 청년 일자리 확대-좋은 일자리 창출-출산율 제고-최저임금 1만원 시대-노조의 희생과 기업의 혁신이 패키지로 들어있었다.
문성현의 역할
지난 3일 문 대통령은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출범식 행사 직전 양대 노총 위원장을 함께 면담했다. 문 대통령이 이들을 한꺼번에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양대 노총은 정기상여금과 일부 복리후생비를 최저임금에 산입토록 한 최저임금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한 데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민주노총은 모든 사회적 대화에 대한 불참도 선언했다. 나아가 노동계의 반발은 개정안을 진두지휘했던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까지 겨냥하고 있다. 홍 원내대표는 문 대통령의 ‘대선 재수’를 도왔던 친문(친문재인) 진영의 핵심 인사다.
이런 상황에서 문 대통령이 양대 노총 위원장을 동시에 만난 것은 예상 밖이었다. 청와대는 모든 일정이 끝나고 이들의 비공개 면담 사실을 공개했다. 이 자리에는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 정태호 신임 청와대 일자리수석과 함께 문 위원장이 배석했다. 청와대와 노총은 약 15분간의 덕담만 오갔다고 밝혔지만 실제론 양대 노총이 여러 요구안을 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홍 원내대표에 대한 비토와 더불어 노동계 현안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 문 대통령이 직접 ‘해결사’로 나선 것이다.
이 자리를 주선한 것은 문 위원장으로 보인다. 문 위원장은 당시 통화에서 “나도 당일에 연락받고 갔다. 기존 일정도 취소했다”며 말을 아꼈다. 하지만 청와대와 여권에 따르면 이 자리는 사회적 대화 재개 분위기 조성을 위해 문 위원장이 만든 자리였다. 노동계 관계자는 “그날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 민주노총에 물어보라”며 “조만간 움직임들이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민주노총은 공식적인 입장 외에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다만 이후 문 대통령의 인도·싱가포르 순방에서 특별한 장면이 눈에 띄었다. 문 대통령은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한·인도 최고경영자(CEO) 라운드 테이블 행사 포토 세션 직후 곧바로 누군가를 향했다. 쌍용차 대주주인 인도 마힌드라 그룹의 아난드 마힌드라 회장이었다. 옆에는 파완 고웬카 마힌드라 그룹 자동차 부문 대표이사(쌍용차 이사회 의장)가 있었다. 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쌍용차 해고자 복직 문제를 조속히 해결해줄 것을 요청했다.
쌍용차 문제는 민주노총의 아픈 손가락이다. 한상균 전 위원장도 당시 쌍용차 옥쇄파업을 주도했던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장이었다. 이 문제를 문 대통령이 인도 대주주를 만나 해결을 당부한 것이다. 문 대통령과 마힌드라 회장 간의 미팅은 관례상 사전 조율됐을 가능성이 높다. 마힌드라 회장이 고웬카 대표를 대동한 것도 쌍용차 문제가 언급될 것을 예상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청와대 관계자는 “고웬카 대표가 함께 있었던 만큼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민주노총이 이에 어떻게 대응할 지는 미지수다. 한 노동계 고위 관계자는 19일 “문제들이 한 번에 풀릴 수는 없다”면서도 “당분간 민주노총을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최저임금 1만원? 국회서 안 돼”
문 대통령은 최근 최저임금 정책 속도조절에 나섰다. ‘2020년 최저임금 1만원 시대’ 포기를 선언하고 경제적 토대 마련이 우선임을 인정한 것이다. 문 위원장 역시 인터뷰에서 최저임금 1만원 시대는 정부 독단으로 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최저임금을 놓고 보면 정부의 마중물 역할이 먼저다. 대통령이 일자리 안정자금 3조원 가져온 건 마중물이다. 이 최저임금을 시간당 1만원까지 올리려면 10조원, 15조원이 필요하다. 그건 국회서 안 된다.”
그리고 사회적 대화를 강조했다. 상호 희생 속에서 최저임금을 법적인 1만원이 아닌 사회적인 1만원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취지다.
“사회적 대화 과정 속에서 최저임금 산입범위 정리해야 (최저임금) 1만원에 가까이 간다. 그래도 안 된다. 원·하청 문제와 하청단가 등 여러 가지 문제가 많다. 정부는 이미 3조원 일자리 안정기금을 가져왔다. 그렇다면 노조의 사회연대기금(하청 업체 지원기금) 방식, 여기에 회사가 (지원에) 참여하는 방식이 더해지면 최종적으로 1만원 시대가 만들어진다. ‘정부의 마중물+노·사 연대기금’ 방식이 될 것이다.”
최저임금은 사람에 대한 투자이며 ‘어디 가는 돈’이 아니라는 뜻도 밝혔다.
“최저임금은 사람에게 투자하는 거다. 길 닦고 다리 놓는 거 못지않게 중요한건 젊은 사람에 대한 투자다. 이게 어디 가는 게 아니다. 왜 자꾸 퍼주기라 하느냐. 그냥 주는 게 아니고 중소기업을 거쳐서 주도록 하고 있다. 이것도 투자다. 그 돈 어디 안 간다. 최저임금 문제도 정부 마중물 통해 노사가 같이 참여하는 사회적 투자다.”
최저임금 인상은 특히 젊은 층의 사회 진입을 돕기 위한 정책이라고 강조했다.
“1만원만 되면 연봉 2500만원이다. (결혼해서) 둘이 있으면 5000만원이다. 그러면 젊은 사람들이 어디가든 그 정도면 시작할 수 있다. 그 다음으로 격차 문제가 온다. 그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격차를 논의해서 5년이 걸리든 10년이 걸리든 좁혀나갈 수 있다는 전망을 주면 된다. 최저임금 안정화되고 격차 감소 전망만 사회적으로 준다면 젊은이들이 (중소기업에) 갈 거다. 여기에 공장을 개선해 중소기업도 일을 잘 할 수 있는 쾌적한 공간의 스마트 팩토리를 만든다. 최저임금·격차해소·스마트팩토리가 된다면 청년 실업문제도 상당부분 해결될 것이다.”
노조의 마중물
문 위원장은 노조의 선제적 희생을 강조했다. 대기업 노조의 30년 투쟁 결과물인 고임금을 비판할 수 없지만 하청업체 등 약자를 위해 내놓으라는 것이다. 노동계의 입지전적인 인물인 만큼 그는 인터뷰 상당 부분을 노조에 할애했다. 사업자에 대해서는 확실히 말을 아끼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격차 문제가 심각하다. 이대로 두고는 혁신도 불가능하다. 중소기업이 혁신해서 생산성을 높인다 해도 성과물은 대기업이 다 가져가거든. 열심히 할 의욕이 없는 거라. 이런 배경에는 대기업 중심의 이윤과 임금 독점구조가 있다.”
고임금을 받는 대기업 노조는 하청업체, 협력업체를 지원해야 한다고 했다. 법적으로 강제할 순 없지만 일종의 사회적 타협안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 격차를 어떻게 해소할 것이냐. 우린 대기업 노조를 노동귀족이라고 하지만 당사자는 30년 동안 투쟁해서 얻은 성과물이다. 본인으로 봐서는 이거는 정의로운 성과물 인데, 이걸 내놔라 하기는 어렵다. 그러면 어디선가 방법 찾아야한다. SK이노베이션이 임금은 물가 상승수준으로만 올리고, 자기임금의 1%를 상생기금으로 내놓기로 했다. 여기에 사용자가 금액을 매칭해 노·사 상생기금을 만들어 중소협력업체 처우개선에 쓴다. 30년 투쟁해서 SK이노베이션 노조 조합원들은 임금수준이 상당히 올라갔다. 먹고살만 한거다. 임금 인상 걱정도 안하지, 고용불안도 없지, 그러다 보니 협력업체 사정을 보게 된 거다. ‘우리 아들 딸들은 내 자리(직장)를 못 오고 저기(협력업체)를 갈 가능성이 높다’는 거죠. ‘우리가 어쨌든 일자리 좋게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 결과 조합원의 97%가 상생기금 마련에 찬성한 거다.”
이런 방식이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있다. 근본적인 시스템을 바꿀 순 없다는 의미다.
“현재 임금 격차는 대기업 노조의 책임, 사용자 책임, 정부 책임만도 아니다. 이를 노사정이 같이 풀어가자는 거다. 지금 상생기금 1% 가지고는 어림도 없다. 그렇다고 중소기업 노동자 임금을 갑자기 현대차처럼 올릴 수도 없다. 우리나라 전체 임금 스펙트럼 가운데 중간 어디쯤으로 사회적 합의를 해야 한다. 사회적 연대기금 방식이 하나있고. 아예 광주형 일자리처럼 세팅을 같게 하는 방식도 있다.”
그는 이같은 임금 격차, 일자리 격차에 대해 사회적 공론화 방식도 검토하고 있다. 굳이 공론화위가 아니더라도 사회적 타협을 모색해야 한다는 취지다.
“우리는 구조조정 특위 만들어 논의할 거다. 좁혀놓고 보면 대·중소기업 문제다. 노조도 일정하게 구조적 틀에 들어가 있다. 그럼 이 시스템을 고쳐야 하는데, 아, 이대로 둘 수는 없으니까 어쨌든 고민을 해야되는 데, 뭔가 어떤 미래지향적 투자가능한 곳은 노사관계 때문에 못하고, 이걸 어떻게 할거냐, 이 문제에 대한 공론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범국민적 공론화. 이 문제 자체의 심각성, 이로 인해 파생되는 여타 문제의 심각성, 그리고 이 문제가 구조화됐다는 점, 어쨌든 근본적인 대책이 마련되지 않으면 안되는 점. 사회적 대화는 시대적 요구다. 문 대통령의 의지도 아주 강력하다. 일자리 대통령을 표방하고, 노동존중사회를 만들겠다고 하고 있다. 대통령의 의지도 뒷받침되고 있고, 노총과 사용자도 사회적 대화 참여의지와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 격차 문제부터 시작해서 경사노위에서 공론화시키고 방향을 잡아보겠다.”
문재인정부는 노동친화사회를 추구하고 있다. 문 위원장은 대통령과 노동계를 움직일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사다. 정권의 정책 방향과 사회적 흐름에 민감한 기업은 동참할 것이다. 문 위원장의 행보가 주목된다.
강준구 기자 eye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