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축구협회는 감독의 거취 문제를 두고 항상 여론의 눈치를 보며 고민해 왔다. 평가전 부진에 대한 여론악화에 곧바로 감독을 경질했다. 국내파 감독과 외국인 감독이 번갈아 가는 선임이 이어졌다. 장기 계획을 갖고 뚝심 있게 운영하지 못한 것이다. 한국 축구는 4년 주기 월드컵에서 늘 여러 번 감독을 교체해 왔다. 잇따른 감독의 교체는 경기력에서 드러났고, 이는 대표팀 경기의 가치와 흥행성 추락으로 이어졌다.
홍명보 감독 체제로 나선 2014년 브라질 대회에서 처참히 무너진 한국 축구는 다시 외국인 감독에게 손을 내밀었다. 협회의 선택은 울리 슈틸리케 감독이었다. 러시아 월드컵까지 슈틸리케 감독에게 모든 것을 맡기기로 했다.
슈틸리케는 2015년 한 해 동안 16승3무1패의 호성적을 거두며 굉장히 좋은 출발을 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최종예선에 돌입하자 팀이 크게 흔들렸다. 비슷한 기량의 팀들이나 강팀과 마주하면서 한계에 봉착했다. 잘 포장됐던 슈틸리케 감독의 지도력 역시 서서히 민낯을 드러냈다.
협회는 지난해 4월 부진한 경기력을 이어가던 슈틸리케 감독의 경질을 논의했다. 하지만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은 유임이었다. 하지만 2개월 후, 그것이 잘못된 판단이었음을 깨달은 협회는 결국 슈틸리케 감독을 경질하고 국내파 감독으로 시선을 돌려 신태용 감독에게 부랴부랴 감독직을 맡겼다. 이후 대표팀은 1년이 되지 않는 시간 동안 팀을 갖춰 월드컵에 나서야 했다.
최강희 전 대표팀 감독은 “대한축구협회는 장기 계획을 수립하지 못한다. 외국 감독이든 국내 감독이든 선임 후에는 4년 동안 무조건 맡겨야 한다. 그래야 자기 색깔을 낼 수 있다”며 여론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협회에 대해 강도 높은 비난을 한 바 있다. 모든 것은 월드컵이 열리는 4년 계획을 주기로 수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장기적인 플랜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인데, 아시아 축구의 이란이 그 좋은 선례다.
◆ 케이로스와 함께한 7년, 아시아 최강자가 되다
이란은 스페인, 포르투갈과 함께 월드컵 죽음의 조에 속하며 조별예선을 통과하지 못했다. 하지만 내용면에선 충분히 칭찬을 받을 만했다. 이란은 ‘늪 축구’로 통칭되는 질식수비를 앞세워 우승후보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맞서 대등하게 싸웠다. 유럽파로 구성된 북아프리카의 강호 모로코는 1대0으로 제압했다.
이란이 아시아 축구의 최강자로 우뚝 서게 되기까지엔 카를로스 케이로스 감독의 막강한 지도력이 있었다. 2011년 포르투갈 대표팀을 떠나 이란 지휘봉을 잡은 카를로스 케이로스 감독은 체력적인 축구를 강조하며 수비를 강력하게 만들었다. 잉글랜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알렉스 퍼거슨 전 감독의 수석코치로 활약하며 전술적으로 보조했던 그는 이란에서 자신의 축구 철학과 전술적 역량을 완벽하게 녹여내고 있다.
7년. 이란이 수비일변도라는 자신들만의 철학을 가지고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서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러시아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 1063분 동안 무실점을 기록한 수비력은 세계 무대에서도 증명됐다. 조별리그 3경기를 완주하는 동안 단 2골만 실점했다. 케이로스 감독은 지루한 축구라는 일각의 조롱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실리적인 축구를 구사하며 옳은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냈다. 페르난도 이에로 스페인 대표팀 감독은 “케이로스 감독은 놀랍다. 경이롭고 정말 전문적이다. 이란은 확실한 철학을 가지고 있는 놀라운 팀”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특히 이란은 한국에게 가히 천적이라 할 정도로 강한 모습을 보였다. 한국은 러시아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1무1패를 포함해 2009년 이후 최근 10년간 1승3무5패로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케이로스 감독은 이번 월드컵을 끝으로 이란을 떠나겠다고 공언했지만 이란축구협회의 끈질긴 설득에 마음을 돌렸다. 이란축구협회는 지난달 30일 케이로스 감독과 내년 1월 있을 아랍에미리트(UAE) 아시안컵까지 재계약을 체결했다. 이란축구협회장은 “케이로스 감독은 2019 아시안컵까지 이란 대표팀을 지휘할 것이다. 우리는 아시안컵에서 우승할 수 있다”며 전폭적인 신뢰를 보였다.
한국축구는 기성용, 구자철 등 기존의 베테랑 선수들이 이번 대회를 끝으로 대표팀 은퇴를 고려하며 세대교체라는 변화의 시기를 맞게 됐다. 한국 축구만의 개성 있는 전술과 감독이 추구하는 철학이 입혀져 조직적인 하나의 팀으로 갖춰질 수 있도록 장기적인 플랜이 필요하다.
협회는 5일 오후 감독선임위원회 회의를 거쳐 신태용 감독의 거취에 대해 결정할 예정이다. 신 감독의 유임 여부를 결정한 뒤 새 감독 후보군을 정리하고 검토, 접촉하는 등 일련의 작업을 진행할 계획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협회에는 루이스 스콜라리 감독 뿐만 아니라 무수히 많은 외국인 감독들의 이력서가 전달됐다. 대개 해당 감독들의 국내 대리인을 자처한 에이전트들이 보낸 자료다. 다양한 카드를 손에 쥐고 있는 축구협회다. 네덜란드의 루이스 판할 감독과 터키의 세뇰 귀네슈 감독 또한 후보군 중 한명이다.
협회는 한국 축구의 비전과 장기 플랜을 실행할 수 있을 만한 적임자로 누구를 택할 것인지 고민을 거듭 중이다. 이미 최종예선이 끝난 후 거스 히딩크 감독 선임 문제와 관련해서 한차례 곤욕을 치른 바 있다. 변화를 앞둔 이번 협회의 선택에 국민적 관심이 더욱 집중되고 있는 이유다.
송태화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