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월드컵에서 일본이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16강에 진출했다. 세네갈과 승점에서 같았지만 페어플레이 점수가 높아 H조 1위 콜롬비아에 이어 2위로 간신히 16강 티켓을 따냈다.
◆ 상처뿐인 승리
하지만 상처뿐인 승리였다. 일본은 비기기만 해도 16강에 오를 수 있었는데 후반 14분 폴란드 얀 베드나렉에게 선제골을 내줬다. 일본은 콜롬비아가 세네갈을 1-0으로 이기고 있다는 상황을 듣자 곧바로 후방으로 볼을 돌리며 시간 끌기에 나섰다. 경기가 진행될수록 관중의 야유가 커졌지만 일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철저하게 의도된 작전이었다. 일본 대표팀 니시노 아키라 감독은 경기 후 “16강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기뻐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일본 열도는 ‘훌륭한 작전’ vs ‘부끄러운 승리’로 양분됐다. 훌륭한 작전을 주장하는 측은 “그 상황에서 세네갈이 동점골을 넣을 지도 모름에도 불구하고 볼을 돌리는 작전은 대담한 결심”이라고 말한다. 세네갈이 동점 골을 넣을 경우 일본은 조별 예선에서 탈락하게 되는 상황이었다. 또한 체력을 카가와 신지 등 핵심 선수들의 체력을 비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전략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부끄러운 승리로 느끼는 일본 여론이 만만치 않았다. 일본 지역 신문인 고베신문사는 트위터를 통해 약 9000명을 대상으로 ‘폴란드전 막판에 보여준 니시노 감독의 지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선택형 문항으로 물었다. 조사결과 ‘이해하지만 실망스러웠다’는 답변이 34%를 차지했고 ‘공격에 나섰어야 했다’는 답변 또한 11%에 달했다. 약 45% 정도가 일본의 승리가 부끄럽다고 느낀 것이다.
경기 후 선수들은 결과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무기력한 경기 내용에 대한 외신들의 비판도 이어졌다. “페어플레이 점수가 높은 팀에 오히려 페어플레이가 없었다” “축구 역사에 안 좋은 사례로 남을 것” 이라는 의견이 주를 이뤘다. 결국 니시노 감독과 일본 선수단은 통산 3번째 16강 진출, 아시아 최다 기록을 세우고도 마음껏 기뻐할 수 없게 됐다.
◆ 그래도 기쁘다…강에 뛰어드는 일본시민들
하지만 현장에서 확인한 일본 시민들의 반응은 대체로 16강 진출에 만족해하는 것 같았다. 경기가 끝난 후 오사카 도톤보리에서는 이미 16강 진출 기념으로 도톤보리 강에 입수하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도톤보리에서는 새해맞이, 명절, 각종 행사가 끝난 뒤 사람들이 강에 뛰어드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 때문에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사고가 간혹 발생하기도 한다. 오사카에 거주하는 료헤이씨는 “일본의 16강 진출이 너무 자랑스럽다. 아시아에서 유일하다”며 “울트라 닛폰”을 외쳤다. 이후 료헤이씨는 오사카 강물에 뛰어들 준비를 했다.
료헤이씨가 강에 입수한 후 연이어 시민들이 강물에 뛰어들었다. 강에 입수하는 사람들은 일본의 응원가를 부르기도 하고, 단체로 퍼포먼스를 한 뒤 몸을 던지기도 했다. 입수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대기자 줄도 있었다. 시민들은 한 명, 한 명 ‘풍덩’ 소리가 날 때마다 소리와 탄성을 자아내며 재미를 즐기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하루코씨는 “정말 재밌지 않냐”며 “계속 보고 싶은데 경찰이 2시부터는 통제할 것 같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일본사람들은 대부분 경기내용의 디테일보다는 16강 진출 그 자체에 만족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현장을 떠나려는 순간, 한 일본인 중년 남성의 말이 귓등을 때렸다. “저런 경기를 보고도 물에 뛰어들 생각을 하나.” 남성은 자전거를 타고 곧바로 떠났다. 승리에 부끄러워하는 시민이었다.
◆ 118㎞ vs 83㎞, 일본이 부럽지 않은 이유
중년 남성의 말을 듣는 순간, 내심 부러웠던 일본의 16강 진출이 부럽지 않게 됐다. 일본은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폴란드전에서 일본의 총활동량은 83㎞에 불과했다. 세네갈전에서 지치지 않는 체력으로 105㎞를 질주했던 활동량이 폴란드전에는 22㎞나 감소한 것이다. 영국 BBC는 “일본 축구가 웃음거리로 전락했다”며 혹평했고, 레온 오스먼 BBC 축구 해설위원도 “마지막 10분 동안 일본의 플레이는 월드컵에서 아무도 보고 싶지 않아 한다”며 “정말 형편없는 경기”라고 지적했다.
반면 한국은 멕시코전에서 99㎞를 뛰다가 세계 1위 독일전에서 118㎞를 달리며 기적 같은 승리를 거뒀다. 최선을 다했다. ‘투혼’에 기반한 승리였다. 일각에서는 “투혼과 체력만을 앞세우고 승부에 집착하는 한국식 축구로는 기술축구를 구사하는 유럽과 남미팀을 넘어설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한국대표팀의 정체성은 ‘투혼’을 빼놓고는 설명하기 힘들다. 실력만큼이나 투혼이 중요시되는 이유다. 결정적으로 투혼은 대한민국 국민들을 감동하게 했다. 팬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16강 진출 그 자체보다도 ‘잘 싸우는 것’이었다. 이번 월드컵이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로 불리는 이유다.
혼다는 일본의 16강 진출 이후 “팬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했고 손흥민은 한국의 16강 탈락 이후 “16강에 진출하지 못했지만 마지막 경기를 멋지게 장식했다. 선수들이 최선을 다했다”며 “4년 전과 비교해보면 너무나 후회 없는 경기였다”고 말했다. 이 인터뷰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일본의 16강 진출이 부럽지 않은 이유다.
오사카=박재현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