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 그 뒷면… 한국 축구의 오늘을 만든 ‘월드컵 악몽’ 5선

입력 2018-06-29 06:03 수정 2018-06-29 06:03

한국은 1986 멕시코월드컵부터 2018 러시아월드컵까지 9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1954 스위스월드컵을 포함하면 본선 진출 횟수는 10회. 아시아에서 유일무이한 기록이다. 한국은 어느덧 월드컵에 항상 초대받는 손님이 됐다.

월드컵은 모든 축구선수에게 꿈의 무대다. 월드컵을 위해 4년 동안 선수들이 갈고 닦는 노력과 흘리는 땀방울은 그 어떤 것과 바꿀 수 없는 숭고한 가치를 지닌다. 하지만 월드컵에서 부진하거나 패배로 직결된 실수를 범한 선수가 안게 되는 비난과 심리적 압박은 그 이후의 삶에서 트라우마로 남는다. 이 ‘악몽’은 한 선수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상처가 되기도 하고, 다른 누군가에겐 한 단계 성장할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

안정환 MBC 해설위원은 27일(현지시간) 러시아 카잔 아레나에서 독일과 맞서 싸우는 후배들을 독려하며 “다친 몸은 치료하면 되지만 월드컵에서 안게 된 마음의 상처는 평생을 간다”며 진심어린 조언을 했다.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지만 지금 생각하면 ‘영웅’이다. 뭇매를 맞았던 이들의 악몽은 한국 축구의 오늘을 만든 과정이 됐고, 축구팬에겐 한 시절을 떠올리는 추억이 됐다. 축구팬의 기억에 깊숙하게 남게 된 한국의 ‘월드컵 악몽’ 5선을 뽑았다.

94년 미국 월드컵 당시 황선홍.

1. 황선홍: 1994 미국월드컵

한국은 앞서 스페인과 극적인 2대 2 무승부로 볼리비아와 2차전에서 단 한 점차라도 승리했다면 월드컵 본선 출전 사상 첫승은 물론 16강 진출도 가능했다. 하지만 한국은 볼리비아에 일방적인 공세를 퍼붓는 와중에도 아쉬운 골 결정력으로 0대 0 무승부를 거뒀다. 패배에 따른 비난은 차례 득점 기회를 살리지 못했던 황선홍의 몫으로 돌아갔다. 당시 황선홍의 슛 상당수가 골대를 한참 벗어나 하늘로 치솟았다.


한국은 결국 2무1패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볼리비아전의 무승부가 발목을 잡고 말았다. 황선홍은 독일과의 조별리그 최종전에서 만회골을 넣으며 체면을 세웠으나 앞서 볼리비아전에서의 부진을 자책하듯 별다른 골 세리머니를 하지 않았다. 귀국 후 황선홍은 원조 ‘국민 역적’이 되며 엄청난 팬들의 질타와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황선홍은 훗날 “이 경기의 후유증으로 한동안 대인기피 증세를 보이기도 했을 만큼 큰 심리적 고통을 받았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황선홍이 1990·2000년대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스트라이커였다는 사실을 부인할 축구팬은 없다. 황선홍은 8년 후 은퇴를 앞두고 출전한 2002 한일월드컵 폴란드전에서 선제 결승골을 넣고 ‘월드컵 악몽’을 완전히 털어냈다.

1998 프랑스월드컵에서 퇴장당하는 하석주. 게티이미지 코리아

2. 하석주: 1998 프랑스월드컵

‘왼발의 마법사’란 별명을 갖고 있던 하석주는 조별리그 첫 경기 멕시코 수비수 몸에 맞고 굴절되는 행운의 프리킥 득점을 기록했다. 이는 한국의 월드컵 사상 첫 선제골이기도 했다.

‘영웅’으로 끝날 것만 같던 하석주는 불과 2분 뒤 ‘죄인’으로 돌변했다. 선제골을 기록한 기쁨에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해 멕시코의 라몬 라미레스에 백태클을 날렸다. 하석주는 경고 없이 바로 레드 카드를 받고 퇴장을 당했다. 골 넣고 퇴장당한 선수들을 모은 ‘가리샤 클럽’의 세 번째 가입자가 됐다.

하석주의 퇴장으로 한국은 1명이 부족한 상황에서 3골을 연속으로 허용하고 멕시코에 1대 3으로 완패했다. 하석주는 경기가 끝난 뒤 죄책감에 외부와의 접촉을 일체 끊고 칩거 상태에 들어가기도 했다. 이 경기 이후 차범근 감독은 성적 부진을 이유로 월드컵 도중 경질됐다.

하석주는 훗날 “1998년 멕시코전에서 백태클로 20년 가까이 욕을 먹고 있다”며 “차범근 감독 앞에서는 얼굴을 못 들었다. 내가 도망 다녔다. 축구 행사에도 차범근 감독님이 계시면 피해 다녔다. 지금까지 그렇다”고 털어놨다.

사진 = 당시 이동국의 슈팅 상황. SBS 힐링캠프 방송화면 캡처

3. 이동국: 2010 남아공월드컵

일명 ‘물회오리 슛’의 장본인이다. ‘1998년 K리그 신인왕’ ‘K리그 역대 최다골 기록 보유자’처럼 이동국에 붙여진 수식어는 화려하지만 2010 남아공월드컵에서는 비운의 스트라이커로 남았다.

이동국은 이 대회에 어렵게 대표팀으로 승선해 우루과이와의 16강전에 나섰다. 박지성의 패스를 받아 득점까지 올릴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를 잡았지만 회심의 슛은 빗물을 잔뜩 먹은 잔디 탓에 힘없이 데굴데굴 굴렀다. 축구팬들은 이 장면을 ‘물회오리 슛’으로 기억한다.

한국은 우루과이에 1대 2로 패해 16강에서 탈락했고 이동국에게는 마지막 월드컵이 됐다. 한국은 내용에서 승리를 기대할 만 했던 경기력을 선보였다. 이동국의 실책이 진한 아쉬움으로 남은 이유는 그래서였다.

사진 = 정성룡 SNS캡처

4. 정성룡: 2014 브라질월드컵

정성룡은 브라질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 탑승한 후 자신의 SNS에 “한국에서 보자. 월드컵 기간 아니, 언제나 응원해주신 분들 항상 감사하다. 더 진보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앞으로 더 좋은 모습 보여드리겠다. 다같이 퐈이야”라고 적었다. 결심과 감사를 전한 글이었지만 마지막 사족이 문제였다.

대표팀은 당시 졸전 끝에 조기 탈락해 여론이 좋지 않았다. 유쾌한 듯 보이는 ‘퐈이야’는 여론의 역풍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조별리그 1·2차전에서 만난 러시아와 알제리에 무려 5골을 내주고 벨기에와 3차전에서 출전 기회조차 잃었던 정성룡이었기에 국민적 분노가 컸다.

정성룡은 국가대표 ‘넘버원’ 골키퍼 자리를 김승규에게 내줘야 했다. 이후 일본 J리그 가와사키 프론탈레로 이적하기 전까지 상대팀 관중에겐 정성룡이 공을 잡을 때마다 ‘퐈이야’란 야유가 빗발쳤다.

한국-멕시코전 장현수가 PK지역에서 핸들링 반칙을 하고 있다. 뉴시스

5. 장현수: 2018 러시아월드컵

장현수는 한국이 조별리그 1·2차전에서 연패를 당할 때 연속된 실책을 범하여 패배의 원흉으로 지목됐다. 스웨덴을 상대로 장현수가 범한 패스미스는 김민우의 파울을 이끌어내 비디오 판독(VAR) 페널티킥으로 이어졌다. 경기가 끝난 뒤 장현수의 무리한 패스가 박주호의 햄스트링 부상을 입힌 것이라는 지적이 쏟아졌다.

멕시코전에서도 장현수의 연속된 실수가 나왔다. 장현수는 전반 25분 상대의 크로스를 차단하는 과정에서 핸드볼 반칙을 범했다. 주심은 곧바로 페널티킥을 선언했고, 한국은 허무하게 선제골을 내줬다. 당시 공격 전개가 좋았던 한국에 ‘찬물’을 뿌린 실점이었다.

페널티킥 선제골을 내주고 무거운 마음으로 경기를 속개했지만 장현수의 실책은 후반 21분 또 다시 나왔다. 멕시코의 역습 상황에서 상대 공격수 치차리토는 장현수의 슬라이딩 태클을 기다렸다는 듯이 가볍게 제친 뒤 우리 골문을 다시 열었다. 장현수는 태클보다 상대를 조금 더 관찰하고 침착하게 수비했으면 실점 확률을 줄일 수 있었다.

2연패의 ‘원흉’처럼 지목된 장현수의 독일전 출전 여부 많은 관심을 받았다. 장현수는 신태용호 부동의 센터백 주전으로 월드컵 아시아 예선부터 수비진의 중핵으로 활약해지만, 거듭된 실책으로 인한 자책감과 쏟아지는 비난에 평정심을 유지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신 감독은 장현수를 신뢰했다. 독일전에서는 중앙 수비수가 아닌 수비라인 바로 앞 포어리베로 포지션으로 경기에 나섰다. 전반전 몇 차례 볼처리 실수를 범했지만 독일의 파상공세를 안정적으로 막아내고 적극적으로 공격에 가담했다. 한국은 이 경기에서 독일을 2대 0으로 격파했다.

송태화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