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사소송시 가해자에게 성폭력 피해자 신상 ‘고스란히 노출’

입력 2018-06-28 05:11 수정 2018-06-28 05:11

민사소송시 성폭력 피해자들의 개인 정보가 가해자에게 고스란히 전달돼 피해자들이 불안에 떨고 있다.

피해자 A씨는 2015년 준강간을 당했다. 가해자는 서울중앙지법에서 2016년 1월 준강간치상으로 4년형을 받고 2019년 7월 만기 출소 예정이라고 한다. 이후 A씨는 민사소송을 통해 손해배상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판결문에 A씨의 전화번호와 집 주소 등 인적사항이 그대로 가해자에게 송달됐다. 이사 갈 형편이 안 되는 A씨는 내년이면 출소하는 가해자가 두려워 국민신문고를 비롯해 법원, 검찰청, 인권위 등 여러 곳에 글을 올렸지만 만족할 만한 답변을 받지 못했다. 심지어 접근금지 신청도 일단 가해자가 피해자의 눈앞에 나타나야 가능하다는 말 뿐이었다.

피해자 A씨의 국민신문고 민원 답변 결과

A씨는 불안한 마음에 핸드폰 번호도 바꾸고 개명도 했지만 “가해자가 본인의 신상 정보를 다 알고 있다”며 “가해자의 출소일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불안한 심정은 커져만 간다”고 전했다. 법원은 피해자가 성인이고 가해자가 초범이며, 가해자의 행동이 우발적이라고 판단해 가해자의 신상공개 명령을 기각했다.

또 다른 피해자 B씨의 사례이다. B씨는 최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성폭력피해자 등 범죄피해자가 민사소송 시 인적사항이 노출되지 않도록 해주세요’ 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고 27일 오후 4시 30분 기준 1만 2000명 가량이 청원에 동의했다.

B씨는 인터넷 카페에서 알게 된 남성들로부터 몇 달 동안 통신매체이용음란 피해를 당해 형사고소에 이어 민사소송을 냈고 민사소송에서 승소한 판결문으로 재산명시 신청을 하자, 법원이 재산명시 결정문에 B씨의 이름과 주소는 물론 13자리 주민등록번호까지 기재해 가해자에게 송달하는 바람에 B씨의 신상정보가 가해자에게 모두 노출됐다.

B씨는 “요즘은 주민번호 보호가 강화돼서 각종 신청서에도 주민번호 뒷자리를 쓰지 않고 생년월일만 쓰도록 주민번호 보호가 강화됐는데 성폭력 피해자의 주민번호를 가해자에게 노출시키는 일을 당하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며 “피해자의 인적사항이 전혀 보호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고 울분을 토했다.

현행법상 범죄피해를 입은 경우 형사고소는 가해자를 처벌하기 위한 절차이고 가해자에게 손해배상을 받으려면 따로 민사소송을 제기해야 한다. 형사고소 과정에서는 성폭력 피해자가 가명 조서를 쓸 수 있는 등 피해자의 인적사항을 보호하고 있다. 그러나 성폭력 피해자가 민사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하는 경우에는 성폭력 피해자의 인적사항이 전혀 보호 되지 않고 실명, 주소 등 인적사항이 그대로 가해자에게 노출되고 있다.

이같은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지난 1월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이 피해자의 인적사항 노출을 막는 민사소송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국회에서 머물러 있다. 이 법안 또한 원고의 인적사항의 일부 또는 전부를 가리고 송달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는 있으나 민사집행 과정에서 열람·등사 신청시 피해자의 인적사항 보호에 대한 내용은 들어가 있지 않아 피해자 신상보호에 한계가 있다.

범죄 피해자의 손해배상 청구권은 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권리지만 인적사항 노출에 따른 보복범죄를 당할 우려 때문에 손해배상 청구를 포기하는 피해자들이 속출하고 있는 실정이다.

박지현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