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으로 수사를 받고 있는 대법원이 이번엔 ‘증거인멸’ 논란에 휩싸였다. 양 전 대법원장 등이 사용했던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퇴임 후 복구가 불가능하게 삭제한 ‘디가우징’ 작업을 놓고 대법원은 ‘통상적 절차’라고 해명하고 있다. 그러나 의혹 핵심 인물 관련 자료를 조사가 진행되던 중에 폐기한 것은 그 자체로 증거인멸 혐의로 검찰 수사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반론도 커지고 있다.
대법원은 27일 양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의 하드디스크가 디가우징된 과정과 관련해 “관련 규정과 통상의 업무처리 절차상 대법관 이상의 경우 퇴임 시 하드디스크를 폐기처분하는 것이 원칙이고 이에 따라 이뤄진 일”이라고 밝혔다. 전날 “이상훈·이인복 대법관이 퇴임했을 때도 디가우징했다”고 설명한 데 이은 공식 해명이다.
그러나 여러 차례 걸친 설명에도 불구하고 대법원을 향한 의혹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양 전 대법원장이 퇴임하고 하드디스크를 디가우징한 지난해 10월은 앞서 진행된 사법부 블랙리스트 등 의혹 1차 조사가 미흡하다는 지적에 따라 새로 취임한 김명수 대법원장하에서 2차 조사 필요성이 제기되던 때였다. 박 전 대법관 하드디스크가 디가우징된 지난해 6월에는 의혹에 연루된 컴퓨터를 보존해야 한다는 법관대표회의 촉구도 있었다. 이런 정황을 감안할 때 통상적 원칙을 그대로 적용한 것도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검찰은 일단 양 전 대법원장 등의 컴퓨터 하드디스크가 디가우징된 경위를 파악한다는 입장이지만, 의혹이 커짐에 따라 증거인멸 혐의 수사도 배제하기 어렵다는 관측이 나온다.
검찰 고위 관계자는 “통상적인 절차에 따랐다는 대법원 설명이 맞는다고 하더라도 당시 조사가 진행 중인 것을 고려하면 충분히 (증거인멸을) 의심할 수 있다”고 말했다. 현행 형법상 타인의 형사사건 또는 징계사건에 관한 증거를 인멸·은닉 또는 변조하거나 자신의 형사 사건을 타인에게 지시해 인멸하게 하는 것은 모두 처벌 대상이다.
논란이 커지자 현 대법원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김명수 대법원장과 안철상 법원행정처장도 이날 출근길에서 “증거인멸 의혹까지 더해져 사법부 불신이 확대되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취재진 질문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대신 법원행정처 차원의 공식 설명에서 당시 디가우징 작업에 대해 “해당 대법원장실과 대법관실에서 퇴임 시에 직접 처리를 지시한다. 행정처 내 폐기 여부 결정에 대한 별도 결재선은 없다”며 사실상 현 대법원이 결정한 일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조민영 이가현 기자 my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