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언론은 23일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별세 소식을 잇따라 보도했다. 대체로 김 전 총리가 한일 국교 정상화의 주역이었으며 지일파였던 점을 강조했다.
NHK방송은 “김 전 총리는 육군 출신으로 196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일으킨 쿠데타에 깊이 관여했으며 정보기관 수장을 지낸 뒤 정계에 입문해 총리 등 요직을 역임했다”면서 “특히 김 전 총리는 일본 정계에 파이프라인을 가진 ‘지일파’의 선구자적인 존재였다”고 전했다.
NHK방송은 또 “1962년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상과 국교 정상화에 관한 협상을 통해 일본의 한국 경제협력 규모를 정리한 ‘김-오히라 메모’가 작성되면서 1965년 국교 정상화로 연결됐다”고 평가했다. 이어 국교 정상화 이후엔 김 전 총리가 한일 의원연맹 초대회장을 지내는 등 일본과 깊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덧붙였다.
아사히 신문 역시 “한일 수교 협상을 마무리했으며 지일파로서 오랫동안 한일간 통로 여할을 해온 김 전 총리가 타계했다”면서 “김 전 총리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측근으로서 1961년 군사 쿠데타에 참여했으며 이후엔 김영삼, 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과 함께 ‘3김’으로 불렸던 한국 정계의 중진이었다”고 평했다.
아사히 신문은 중앙정보부(국가정보원)의 초대 부장이었던 김 전 총리가 박 전 대통령과 함께 한일 국교 정상화를 추진했던 주역이라고 썼다. 1962년 일본을 방문해 오히라 마사요시 당시 외상과 회담한 김 전 총리가 국교 정상화 후 일본의 경제 지원에 대해 ‘무상 지원 3억 달러, 유상 지원 2억 달러’라는 ‘김-오히라 메모’에 합의하면서 국교 정상화의 토대가 마련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사히신문은 1973년 8월 도쿄에서 일어난 김대중 납치 사건 당시 중앙정부가 관여한 혐의가 거세졌을 때 당시 김 전 총리가 그 해 11월 일본을 방문해 당시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와 회담을 통해 일본이 수사를 사실상 종결시키기로 합의했다고 지적했다. 또한 일본어를 구사하는 김 전 총리가 다케시타 노보루, 오부치 게이조, 나카소네 야스히로 등 전 총리들과 친분을 맺는 등 일본 정계에 폭넓은 인맥을 통해 한일간 현안 해결에 기여했지만 물밑 협상을 통한 정치수법은 ‘한일 유착’을 초래했다고도 지적했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