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JP) 전 국무총리가 23일 작고하면서 한국 현대정치를 지배했던 이른바 ‘3김(金) 시대’의 주역들이 모두 역사 속으로 퇴장했다. 앞서 2009년 김대중(DJ) 전 대통령에 이어 2015년 김영삼(YS) 전 대통령도 유명을 달리했다.
동교동계(DJ), 상도동계(YS), 청구동계(JP)로 상징되는 3김의 정치역정은 한국정치사의 굴곡을 그대로 보여줬다. 3김은 때로는 같은 편이었다가 때로는 반대 편에 서는 등 “영원한 동지도 적도 없다”라는 정치현실을 보여줬다.
육사 출신인 JP는 1961년 처삼촌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쿠데타에 가담하면서 정치에 발을 들여놓았고, DJ와 YS는 1967년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에서 40대 기수론을 내걸고 첫 대결을 펼치면서 야권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하지만 3김 시대가 본격적으로 펼쳐진 것은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이후부터다. 앞서 박 전 대통령이 1979년 10·26사태로 타계한 뒤 3김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는 듯했으나, 12·12쿠데타와 전두환 신군부의 집권으로 오히려 혹독한 시절을 보내야 했다. DJ는 내란음모죄로 구속돼 사형선고를 받았고, YS는 가택연금 상태에 들어갔다. 그리고 JP는 권력형 부정축재자 1호로 몰려 재산을 압류당하고 정치활동이 금지됐다.
1987년 민주화 항쟁과 함께 3김은 다시 정치의 전면에 나섰다. 그 해 말 대선을 앞두고 3김과 노태우 당시 여당인 민정당 후보가 출마했다. 비록 노태우 대통령이 당선됐지만 한국 정치는 3김의 합종연횡에 의해 좌지우지 됐다. 특히 이듬해인 1988년 4월 총선에서 YS(통일민주당), DJ(평민당), JP(신민주공화당)는 각각 영남, 호남, 충청의 표를 결집하면서 여소야대 구도를 만들었다. 지역주의와 소선거구제의 독식 구조 속에서 3김은 정치적 영향력을 극대화했다.
1990년대는 3김 시대의 절정기였다. YS와 JP는 88년 4월 총선에서 민의를 거스른 채 1990년 집권여당인 민정당과 합당에 참여해 거대여당인 민주자유당을 만들었다. 그리고 1992년 대선에서 YS는 민자당 후보로 출마해 야당후보인 DJ를 누르고 당선됐다. YS와 JP는 초반엔 협력 관계를 유지했지만 JP가 1995년 민자당을 탈당해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하면서 다시 결별했다. 1997년 대선에서는 DJ와 JP가 손을 잡았다. DJ는 JP와의 ‘DJP 연합’을 통해 후보 단일화를 이뤄내면서 대통령에 당선됐다.
JP는 DJ정부 초대 총리가 됐지만 2001년 9월 내각제 개헌 약속이 이뤄지지 않았다며 DJP 공조 파기를 선언했다. 이후 JP는 자민련 총재로서 대권 도전에 나섰지만 2004년 총선에서 참패하자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이로써 3김은 모두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게 됐다.
3김 시대는 민주화 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과정으로 3김이 민주화에 이바지했다는 긍정론도 있지만 영남·호남·충청을 기반으로 하는 3김씨의 지역패권주의와 보스·계파정치의 폐해를 심화시켰다는 비판이 크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