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이르면 이번 주 시작될 북·미 고위급 후속협상에서 북한에 핵 프로그램 리스트 신고를 우선 요구할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의 비핵화 목표인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CVID)’ 가운데 ‘V(verifiable·검증가능한)’를 구체화하는 데 주력하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외교소식통은 17일 “미국이 가장 시급하게 여기는 과제는 검증가능한 비핵화이고, 검증의 시작은 신고”라며 “미국은 북한과의 후속협상에서 신고 대상 핵시설과 핵물질, 핵무기의 범위를 정하는 과정부터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소식통은 “미국은 올해 안에 이행해야 할 비핵화 초기 조치로 검증을 꼽고 있다”면서 “북한이 이를 전향적으로 수용하고 양측이 최대한 시기를 앞당기는 데 합의하면 앞으로 한 달 내에 폐기 대상 목록을 정하는 수준까지 나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후속 협상에선 양 정상이 공동성명에는 담지 않았지만 구두합의한 북한 미사일 엔진 시험장 폐쇄, 한·미 연합 군사훈련 중단 등도 논의될 전망이다.
이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면 영변 핵시설 가동 중단, 국제원자력기구(IAEA) 및 미국 사찰단의 방북 수순으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완전한 비핵화의 시한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첫 임기가 끝나기 전인 2020년 말로 잡고 있다. 오는 11월 중간선거 전 가시적인 비핵화 성과가 필요한 트럼프 대통령으로선 자국 내 여론을 의식해서라도 비핵화의 핵심인 검증에 주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북한이 이를 받아들일지는 미국이 제시할 체제안전 보장책에 달려 있다는 평가다. 북한의 태도 변화를 기대하는 쪽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첫 만남에서 꽤 두터운 신뢰를 쌓았다는 점, 오는 8월 예정된 한·미 을지프리덤가디언(UFG) 연습이 중단될 가능성 등 달라진 정세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과거 북핵 협상에서 검증은 ‘딜(deal) 브레이커’라고 불릴 만큼 매우 민감하고 까다로운 문제였다. 북핵 해결의 큰 방향을 담은 2005년 9·19 공동성명이 이행되지 않은 결정적인 이유도 검증을 둘러싼 이견 때문이었다.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은 “북·미 고위급 협상에서 신고, 검증, 폐기 혹은 신고, 초기조치, 검증, 폐기 등의 절차를 규정한 프레임(이행구도)을 정하는 것이 우선”이라며 “프레임에 합의하면 정상회담을 한 차례 더 열어 종전선언을 한 뒤 검증 작업에 들어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북한은 6·12 정상회담 이후 양측이 ‘단계별 동시 행동 원칙’에 인식을 같이 했다고 대내적으로 선전하고 있다. 비핵화의 핵심인 검증 과정에 들어가기 전 그에 따르는 체제안전 보장 조치를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정부 소식통은 “북·미 모두 정상회담을 복기하고 후속협상의 의제와 전략을 가다듬는 시간이 필요하다”며 “양측이 속도를 낸다면 이번 주에 고위급 접촉이 있을 수 있겠지만 본격적인 협상으로 들어가려면 다소 시일이 걸릴 수도 있다”고 말했다. 후속협상의 실무를 맡을 미 국무부 내 진용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점도 변수로 꼽힌다.
이런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 간 ‘핫라인’이 본격 가동되면 비핵화 협상은 한층 속도를 낼 전망이다. 양측 고위급 채널이 가동되는 동시에 탑다운 방식의 의사결정 구조가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어서 불필요한 오해를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권지혜 기자 jh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