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월드컵에 등장한 ‘붉은’ 국기… 소련이 그리운 사람들

입력 2018-06-17 16:17 수정 2018-06-17 17:01

2018 러시아 월드컵이 14일(현지시간) 시작됐다. 개막전이 열린 모스크바 로즈니키 스타디움에는 개최국인 러시아의 삼색기가 단연 많이 보였다. 하지만 곳곳에서 ‘붉은’ 국기가 눈에 띄었는데, 붉은기는 옛 소비에트연방(소련)의 국기다. 소련 시절의 오래된 유니폼을 입은 축구팬도 적지 않았다.

왜 하필 소련이었을까. 일본 아사히신문은 소련에 향수를 느끼는 사람들과 그 이유에 대해 17일 전했다.

예프게니 보로프(59)씨는 붉은 바탕에 흰 글씨로 ‘CCCP’라고 적힌 낡은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CCCP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Сою́з Сове́тских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х Респу́блик)’의 약칭이다. 그는 “이 셔츠만 20년간 입었다. 과거 소련팀은 강했다”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소련은 축구 강국이었다.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4강에 진출했고,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결승에서 브라질을 꺾고 우승했다. 그해 유럽선수권대회에서는 준우승을 차지했다.

사진=일본 아사히신문 웹사이트 캡처

보로프씨의 유니폼 등번호는 23번이었는데, 소련의 전설적인 골키퍼 레프 이바노비치 야신의 등번호다. 야신은 1963년 한 시즌 27경기 6실점 및 22경기 무실점이라는 경이로운 기록를 세우며 골키퍼로는 전무후무하게 세계 최고 선수에게 주는 발롱도르 트로피를 수상했다.

하지만 소련을 계승한 러시아는 축구강국이 아니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는 2무1패로 예선 탈락했고, 현재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은 70위로 한국(57위)보다 낮다. 보로프씨는 “요즘 선수들은 지나치게 많은 돈을 받는다”며 “이 나라는 풍요로워졌지만 중요한 것들을 많이 잃었다”고 얼굴을 찌푸렸다.

소련에 속했던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망명한 다니엘 아바에프(42)씨도 소련 국기를 경기장에 들고 왔다. 그는 “스타 선수가 많던 그 시절의 소련으로 돌아가고 싶다”며 “24년을 살아도 미국인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소련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소련에 향수를 느끼는 이들은 한목소리로 “과거에는 국가 자체도 좋았다”고 말한다. 소련 유니폼을 입은 변호사 세르게이 아파나셰프(42)씨는 “일부 사람들의 생각들이긴 해도 일종의 향수”라며 “소련은 풍부하진 않아도 평등한 나라였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지금은 생활수준은 올랐지만 마음은 어둡다”라며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 다음엔 그 돈을 어떻게 지켜야 할지 생각해야 한다.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소련을 직접 경험한 이들만 이처럼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소련 해체 후에 태어난 키릴 마린(24)씨는 가슴에 손은 얹으며 “마음만은 소련”이라고 말했다.

그는 부모의 말에 흥미를 가지면서 인터넷이나 책에서 소련에 대해 공부했다. 마린씨는 “지금은 소련을 나쁘게 평가하는 영화나 책이 많다”면서도 “하지만 예전엔 경제도 스포츠도 발달했다. (소련은) 강한 나라였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러시아 민간여론조사기관 레바다 센터에 따르면 소련 붕괴를 ‘유감’이라 생각하는 러시아 사람의 비율은 절반 이상이었다. 이런 경향은 최근 들어 조금씩 증가하고 있다. 소련 시절이 결코 장밋빛은 아니었지만 자본주의 도입 등으로 사회 불평등이 심화되자 과거를 미화하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AP뉴시스

러시아는 개막전에서 사우디아라비아를 5대 0으로 꺾고 첫 승을 신고했다. 스탠드는 들썩였다. 한 러시아인 남성은 “이 나라가 힘을 되찾기 시작했다”며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권중혁 기자 gre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