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홈페이지 국민청원 게시판에 “국어 교과서 ‘여성적’ ‘남성적’ 단위를 삭제해 달라”는 글이 게시됐다. 작성자는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부터 고등학교 수능특강까지 다양한 국어 교재에서 ‘시’의 어조나 ‘글’의 어조를 말할 때 ‘여성적 어조’ ‘남성적 어조’라고 가르친다”면서 “여기서 말하는 여성적 어조는 ‘~요’이고 남성적 어조는 ‘~다’이다”라고 문제를 지적했다.
이어 “현대어에 여성들만 ‘~요’를 사용하는가? 여성이 ‘~요’를 안 쓰면 그 여성은 남성인가?”라며 “여성들만 ‘~요’를 쓰는가? 남성적 어조도 같은 이유로 이 용어들은 성불평등을 초래한다고 생각한다. 의지적 어조나 경어체로 하루빨리 바뀌길 바란다”고 적었다.
◆ ‘힘 센’ 남자 VS ‘예쁜’ 여자… 교과서에 숨은 성 역할 고정관념
청원인이 지적했듯이 교과서 속 삽화, 이미지, 표현 등에서 성 역할 고정관념을 내포하는 표현들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지난해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이 발표한 교과서 속 성차별 사례들을 보면 성 역할 고정관념을 심어줄 수 있는 표현들이 다수 포함됐다. 남성은 활동적인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강조하고 여성은 다소곳하고 얌전한 이미지로 그렸다. 체육활동을 묘사하는 삽화에서도 응원단은 모두 여자, 심판과 감독 및 선수는 모두 남자로 표현한다.
한 초등학교 체육 교과서에서는 사춘기 신체 성장 변화를 설명하고 있는 본문 내용과 관계없이 남학생은 ‘힘이 세다’ ‘운동을 좋아한다’ 등의 표현들과 함께 튼튼한 신체를 강조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반면 여학생은 ‘예쁘다’ ‘날씬하다’ 등 외모를 묘사하는 표현들 속에 허리에 손을 올리고 귀여움을 강조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남학생은 푸른색의 상의와 바지를, 여학생은 분홍색의 원피스를 입었다.
3학년 국어 교과서에서 가장 아끼는 물건을 소개하는 부분에서 남학생은 축구를 좋아하는 것으로, 여학생은 분홍색 가방과 인형을 떠올리는 것으로 묘사한다. 4학년 사회 교과서 내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모두 남성으로 그려졌고, 연구원으로 일하는 사람도 모두 남성으로 제시됐다. 양평원은 “초등학생에게 교과서가 미치는 영향력이 매우 크기 때문에, 교육과정 개정시 교과서 속에 스며든 성 역할 고정관념을 세심하게 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여자 3명 모인 브런치 모임을 단속”… 성차별 범람하는 TV 프로그램
성차별과 성 역할 고정관념을 부추기는 내용은 국내 TV 예능과 오락 프로그램에서도 만연하다. 양평원이 지난 4월에 발표한 대중매체 양셩평등 모니터링 결과에 따르면 지난 3월 예능과 오락 프로그램에서 나타난 성차별적 내용은 총 56건으로, 성평등적 내용(7건)의 8배에 달했고, 전년도 7월 모니터링에서 집계된 성차별적 내용(19건)과 비교해도 3건가량 늘었다.
그러면서 양평원은 여러 프로그램을 예시로 들기도 했다. 종편의 A 프로그램에서는 한 남성 출연자가 “적어도 브런치 모임이 있는 한 정부가 어떠한 부동산·교육 정책을 내놔도 성공할 수 없다”며 “정책이 발표되면 바로 다음 날 브런치 모임을 갖고 작전을 설계해서 단합 행동을 한다. 여자 3명 이상 모인 브런치 모임을 단속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장면으로 왜곡된 성별 고정관념을 드러냈음을 지적했다.
케이블의 B 프로그램에서는 한 남성 출연자가 “예쁜 것 같다 하는 분들은 앞으로 앉아 주시고, 난 좀 아닌 것 같다 하는 분들은 뒤로 자리를 좀 바꾸는 시간을 갖겠다”라며 여성 방청객의 외모를 폄하하고 놀림거리로 소비하는 등 외모지상주의를 조장했다고 밝혔다.
이수연 여성정책연구원 박사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남녀 갈등을 줄이고 궁극적으로 성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법과 제도에 기댈 게 아니라, 문화와 인식개선이 가장 중요하다는 목소리가 냈다. 이 박사는 “사실 우리나라는 이혼여성 지원제도, 육아와 양육을 위한 지원금 등 법과 제도는 거의 다 있는 상황이다. 문제는 여전히 성차별을 합리화하는 ‘문화’”라고 지적했다. 그는 “미투 운동도 성폭력과 관련된 법이 없어서가 아니라, 피해자를 탓하고 침묵을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결국 언론과 교육을 통해 성 평등 문화를 조성해 나가는 게 중요하다”라고 강조했다.
신혜지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