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 사건에서 진실이 밝혀져서 명예를 회복하기 전에는 어떤 경우에도 도주할 생각이 없습니다. 한 번도 재판에 불출석 한 적 없고, 출국 금지도 해제됐지만 해외로 나간 적 없습니다.”
국가정보원에 민간인·공무원을 불법 사찰하라고 지시한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된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12일 재판부에 석방을 요청하면서 한 말이다. 도주나 증거인멸 등에 대한 우려가 없으므로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게 해달라는 취지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1부(부장판사 김연학)는 이날 우 전 수석에 대한 보석(보증금 등 조건을 내건 석방) 심문기일을 열었다. 우 전 수석이 지난 7일 재판부에 요청한 보석허가신청에 따른 것이다.
이날 법정에서 검찰은 구속 유지의 필요성을, 우 전 수석 측은 불구속 상태에서의 재판을 각각 재판부에 요청하며 열띤 공방을 벌였다.
검찰은 먼저 “우 전 수석은 수사·재판 과정에서 범죄 사실을 전부 부인하고 추명호 전 국정원장으로부터 일방적으로 보고를 받았다거나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지시에 따랐을 뿐이라고 하는 등 모든 책임을 위아래로 전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피고인이 증거인부서(증거 인정·부인 여부에 대한 의견서)를 제출하라는 재판부의 소송 지휘에 불응하며 재판을 지연시켰다”며 “4개월이 지난 시점에서야 첫 번째 증인 신문을 하게 됐다”고 했다.
우 전 수석이 공소사실을 전면 부인하고 재판을 지연시키고 있는 만큼 석방할 경우 적극적으로 증거를 인멸하거나 도주의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를 표한 것이다.
검찰은 “출석 예정된 증인들 중 피고인의 업무상 지휘를 받던 다수의 청와대 직원들이 있어 석방할 경우 증인들을 회유하거나 진술을 조작시켜 증거를 인멸할 가능성이 높다”며 “피고인은 별건으로 징역 2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 받고 항소심 재판 중이라 도주의 우려도 크므로 석방을 불허해달라”고 요청했다.
검찰이 이처럼 증거인멸, 도주 등에 대한 우려를 강조한 것은 형사소송법 95조의 보석 예외 사유 때문이다. 형소법은 피고인이 증거를 인멸하거나 도주할 우려가 있거나 사형 무기 또는 장기 10년이 넘는 징역이나 금고에 해당하는 죄를 범한 경우 등에 예외적으로 보석을 허가하지 않을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우 전 수석은 검찰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그는 “혐의를 인정하거나 부인하는 것은 피고인의 기본권”이라며 “혐의를 전가하고 있다고 말하는 건 검찰이 지나친 것 같다”고 불쾌감을 드러냈다.
우 전 수석은 “대통령의 지시가 있어서 업무를 한 것은 사실”이라며 “대통령 지시 없이 했다는 건 검사가 입증해야지 피고인에게 대통령 지시가 있었다고 입증하라는 건 잘못된 것 아닌가”라며 따졌다. 이어 “민정수석 당시 하루 수십·수백 건의 보고를 받으면서 다 기억하는 건 불가능하다”면서도 “형사상 책임이든 행정적 책임이든 간에 부하가 한 일에 대해 부인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고 밝혔다.
우 전 수석은 증거 인멸과 도주 가능성에 대해서도 선을 그었다. 우 전 수석은 “저와 함께 청와대에서 근무한 직원들은 현직 공무원 신분이라서 사실대로 말을 못하는 것”이라며 “저 때문이라는 검찰의 주장은 과하다”고 했다. 또 “제가 검사를 23년을 했는데 어떤 경우든 피고인이 도주하면 변명의 여지없이 본인의 잘못을 인정하는 뜻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며 “공소사실 전부를 부인하기 때문에 사실을 다퉈서 정당한 재판을 받고 싶지 도망갈 생각은 전혀 없다”고 강조했다.
우 전 수석은 보석심리 내용과 무관하게 자신의 직권남용 혐의에 대한 생각도 밝혔다. 그는 “청와대에서 근무할 때 검찰이나 법원처럼 업무 절차를 규정한 법이나 근거가 없었다”며 “우리나라는 성문법 국가지만 청와대 안에서는 불문법 국가였다”고 했다. 자신이 수행한 직무는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이뤄졌으므로 직권남용 혐의가 없다는 점을 주장한 것이다.
우 전 수석의 발언이 길어지자 재판부는 “마무리 해주기 바랍니다”라며 제지했다. 이에 우 전 수석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예?”라고 반문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재판부는 양측 의견을 고려해 조만간 우 전 수석의 보석 신청에 대한 결론을 내놓을 것으로 보인다.
우 전 수석은 이석수 전 특별감찰관을 불법 사찰하게 하고 문화계 블랙리스트의 운용 상황을 보고받은 혐의 등으로 지난 1월 추가 기소됐다. 최순실씨의 국정농단에 가담한 혐의 등으로도 기소돼 1심에서 징역 2년6개월을 선고 받고 항소심을 진행하고 있다.
구자창 기자 critic@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