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6세기 동아시아 파워국가 ‘아라가야’ 마침내 베일 벗다

입력 2018-06-08 11:45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강동석 연구관이 7일 경남 함안군 가야리 일대에서 처음으로 실체가 확인된 함안 아라가야 왕성(王城)의 상부에 조성된 사각형 수혈(구덩이)을 가리키며 의의를 설명하고 있다. 인위적으로 정교하게 축조된 토성에 조성된 이 구덩이에선 부뚜막의 흔적이 있지만, 생활공간에서 나오지 않는 그릇받침 조각이 나와 특수한 용도의 건물 자리로 추정된다.

지난 4월 경남 함안 가야리 289번지 야산 일대. 주민들이 밭으로 개간하기 위해 절개한 구릉을 지나가던 함안군청 소속 학예사 조신규씨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흙벽 사이로 띠처럼 이어진 검은 선이 토성을 축조할 때 인위적으로 쌓은 목탄층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함안을 기반으로 한 고대국가 아라가야(阿羅加耶) 왕성의 실체가 눈 밝은 군청 직원에 의해 베일을 벗는 순간이었다. 국립문화재청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소장 김삼기)는 5월부터 발굴 조사한 이 토성이 아라가야의 왕성이라고 밝혔다.

7일 찾아간 흙으로 쌓은 왕성은 멀리 북쪽으로 봉산산성을 뒤로 하고, 남쪽으로 왕궁터를 감싸는 듯한 위치에 있었다. 언론 공개 현장에 함께한 조씨는 “남쪽으로는 저기 보이는 말이산 고분군(대규모 고총·세계유산잠정목록) 능선이 있고, 인근에 토기 생산 유적이 있다. 왕성만 있으면 고대 왕국의 3요건을 갖추는데, 이제 그 마지막 요건을 찾은 것”이라고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아라가야는 금관가야(김해), 대가야(고령)와 함께 가야6국을 이끈 중심세력으로 문헌에 기록된다. 561년을 전후해 신라에 정복됐다. 1500여년이 흐른 지금은 길이 50m 왕성의 흔적으로만 남아 있다. 하지만 토성의 높이가 8.5∼10m에 달해 그때의 영광을 짐작하게 한다. 가야권역에서 발견된 같은 시기 유적과 비교할 때 유례가 없을 정도로 대규모다. 금관가야 토성만 해도 3m가 안되고, 백제 몽촌토성도 높이가 6m에 그친다.

자연 지형을 활용한 방식이 놀랍다. 성벽이 밀리지 않도록 축조 공정마다 나무 기둥을 설치했다. 흙을 쌓을 때는 나뭇가지를 쌓은 뒤 불태워 목탄층을 만들어 배수 기능까지 갖췄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강동석 연구관은 “고대에 이 정도 대규모 노동력을 동원한 토목공사를 할 수 있는 정치권력은 왕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며 “출토된 깨진 토기, 건물지, 구덩이로 봐 최전성기인 5∼6세기 중반 때 축조된 것”이라고 말했다.

전성기의 아라가야는 백제, 신라와 쌍벽을 이뤘다. 금관가야가 멸망한 뒤인 529년에는 대가야를 제치고 백제, 신라, 왜의 사신을 불러들여 4개국 사신회의를 주재하기도 했다. 이 무렵 일본서기엔 ‘안라왕(安羅王·아라가야 임금)’이 두 번(544, 552년) 언급된다. 조선시대 읍지(邑誌)인 함주지(咸州誌)와 일제강점기 고적조사보고에도 이 일대를 왕궁지로 추정했다. 하지만 지금껏 발굴조사가 없어 그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다. 강 연구관은 토성의 남쪽, 지금은 밭으로 변한 구릉을 가리키며 “저 어디쯤에서 4개국 회의가 열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적 발굴이 계속돼 가야의 최고 지배층 문화와 대외 교섭 역사가 새롭게 드러나며 신라사에 가려졌던 가야사는 재조명될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 고대사는 삼국시대가 아닌 가야를 포함한 사국시대로 재정의 돼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함안군은 아라가야 왕성의 문화재 지정을 추진하고 2021년까지 국비 포함 100억원을 투입해 복원한다는 계획이다.

함안=글 사진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