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칼 든 남의 손으로 자해 가능” 살인죄 50대女, 항소심 무죄

입력 2018-06-08 02:28

동거남 심장 찔러 사망… 가해자 “내 의지 아니야”
1심서 “불가능” 8년형… 항소심서는 판단 뒤집혀

동거남을 칼로 찔러 살해한 혐의로 중형을 선고 받았던 50대 여성이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았다.

사건은 지난해 5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모(53·여)씨는 사실혼 관계에 있던 유모(53)씨가 자주 폭음을 하고 늦게 귀가해 다투는 일이 잦았다. 사건 당일에는 술에 취한 유씨가 이씨의 머리를 발로 짓누르는 등 격렬한 몸싸움까지 벌어졌다. 격분한 이씨가 거실 바닥에 있던 과도를 집어 들었다. 엎치락뒤치락하다 유씨가 바닥에 쓰러졌다. 왼쪽 가슴을 칼에 찔린 채였다. 유씨는 병원에 후송됐으나 과다출혈로 결국 사망했다. 목격자도 CCTV도 없었다.

사망 원인에 대한 단서는 이씨의 진술뿐이었다. 이씨는 경찰에서 “유씨가 ‘그렇게 해서 죽겠냐’며 칼을 쥔 내 오른쪽 손목을 잡고 스스로 왼쪽 가슴을 찔렀다”고 말했다.

살인 혐의로 기소된 이씨에게 1심은 “방어 의도로 칼을 휘두른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가해행위를 했다”고 판단, 유죄를 인정하고 징역 8년을 선고했다. 유력 용의자인 이씨가 본인에게 불리한 진술을 할 까닭이 없다는 판단에서 나온 결론이었다.

1심 재판부는 “방어를 위해 칼을 휘둘렀다면 베이거나 긁힌 상처가 나야하는데 부검 결과로는 세 차례 가슴 부위를 찔린 상처만 나왔다”고 했다. 이씨의 진술이 사실이라 해도 여전히 유죄라고 봤다. “손이 아닌 손목을 잡은 이상 가슴을 찌르기 전 칼을 충분히 놓을 수 있었다”며 “손목을 잡아끈 힘만으로 심장 근육을 훼손할 정도로 칼날이 들어갈 순 없다”고 1심 재판부는 지적했다.

항소심을 맡은 서울고법 형사7부(부장판사 김대웅)는 이 같은 논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항소심 재판부는 “피고인이 살해 의도로 찔렀다면 심장 근육에 1㎝ 정도, 전체 깊이가 3㎝에 못 미치는 상처만 생겼다는 건 납득하기 어렵다”고 했다. 유씨가 격분한 나머지 스스로 자기 가슴을 찔렀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본 것이다. 근거는 부검 결과 살짝 찌르는 정도로도 같은 상처가 생길 수 있다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사실조회서였다. 피고인이 도중에 칼을 놓을 수 있었다는 등의 1심 판단에 대해서는 “쉽게 단정할 수 없다”고 봤다.

유씨의 자해 가능성에 대한 판단도 엇갈렸다. 1심은 “유씨가 자해할 동기를 찾을 수 없다”고 봤지만, 항소심은 “유씨가 술에 취해 몸싸움을 하는 등 흥분한 상황에서 예상치 못하게 자기 가슴을 찔렀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항소심 재판부는 7일 “피고인이 유씨의 왼쪽 가슴 부분을 칼로 찔러 사망하게 한 사실이 없음에도 원심은 사실을 오인했다”고 판단, 이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고 밝혔다.

항소심의 판단은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에게 유리하게’라는 형사법상의 원칙에 따른 것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검찰 측 증거만으로는 의문의 여지가 여전히 남아 있어 유죄 인정이 어렵다”고 결론을 내렸다.

구자창 기자 critic@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