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 경제지원을 바라보는 두 시각은 햇볕정책과 압박정책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다. 한 쪽에선 이를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은 ‘퍼주기’라 비판하고 다른 쪽에서 정체된 한국 경제의 새로운 동력을 확보하는 ‘투자’라고 강조한다.
6월 12일 오전 10시(한국시간)로 확정된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와 그 반대급부를 다루게 된다. 북한이 ‘CVID’를 수용할 경우 요구할 두 가지는 ‘체제보장’과 ‘경제지원’이다. 북한과 미국이 비핵화에 합의한다면 경제지원이라는 ‘비핵화 비용’을 누가, 얼마나 부담하느냐의 문제가 불거질 게 분명하다.
◆ 트럼프 ‘체제보장은 미국이, 경제지원은 한·중·일이’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2차 방북 후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엄청난 경제적 번영을 이루게 될 거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데 순항하던 북미정상회담은 ‘취소’ 사태를 겪었다. 다시 본 궤도에 올라선 것은 문재인 대통령이 중재자로 나선 뒤였고, 문 대통령은 그 중재의 핵심이 ‘체제보장’ 문제였음을 2차 남북정상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시사했다.
이런 과정은 북한 요구조건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보여줬다. 1순위는 체제보장이고 경제지원은 그 다음에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을 만난 뒤 내놓은 발언은 폼페이오 장관이 했던 ‘경제번영론’과 결이 조금 다르다. 트럼프 대통령은 비핵화에 따른 대북 경제지원을 한국 중국 일본이 하게 될 거라고 했다. 미국의 직접적인 지원에 대해선 선을 그은 것이다.
이렇게 나온 트럼프의 의중을 가늠하기란 어렵지 않다. ‘북한이 가장 원하는 건 체제보장이지 않나. 그것을 해줄 수 있는 나라는 미국뿐이다. 북한의 요구조건 1순위를 내가 들어줄 테니 2순위 경제지원은 주변국인 한·중·일이 해주는 게 맞다.’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민간기업의 대규모 대북 투자”를 말했던 폼페이오와 달리 “한·중·일의 대북 지원”을 강조하고 나선 것은 이런 생각에서일 테다.
비핵화 비용은 핵무기를 해체·폐기하는 데 들어가는 ‘직접비용’과 핵 관련 인력의 전직 등에 쓰이는 ‘간접비용'으로 나뉜다. 여기에 비핵화 대가로 제공할 ‘보상비용’도 포함된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1일(현지시간) 대북 경제지원에 대한 질문을 받고 “한국이 그것을 할 것이고 중국과 일본이 도움을 줄 것”이라고 말한 대목은 보상비용에 해당한다. 가장 규모가 클 보상비용을 한·중·일, 그중에도 한국이 주로 부담해야 한다고 밝힌 것이다.
◆ ‘원조’였던 비핵화 경제지원, 이번엔 ‘인프라 투자’
이는 한국에서 ‘퍼주기 vs 투자’의 논란이 다시 불거질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북한 비핵화 비용은 연구기관이나 학자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향후 10~20년간 많게는 수백조원에 달할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국민대 권혁철 교수는 최근 ‘북핵 폐기 비용에 관한 연구’ 보고서에서 직접·간접·보상비용을 모두 포함한 전체 비용을 최대 270억 달러(약 28조9000억원)로 평가했다. 권 교수는 4일 “이는 탐색적 수준의 연구로 실제 비용이 얼마가 될지는 정확하게 추산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1994년 제네바 기본합의서는 북·미 직접 대화의 결과였지만 비용 대부분을 한국과 일본이 부담했다. 한국은 당시 경수로 건설비 46억 달러 중 70%를, 일본은 총액의 20% 수준인 10억 달러를 내기로 했다. 미국은 연간 50만t 수준의 대북 중유 지원과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운영 자금만 부담했다. 이후 북한이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을 시인하면서 제네바 합의는 파기됐고, 2005년 경수로 건설사업이 공식 종료되기까지 한국이 들인 공사비 1조3655억원은 모두 손실 처리됐다.
한편에선 한국이 적극적으로 ‘투자’ 차원의 대북 지원을 추진해 ‘블루오션’을 선점하고 대북 영향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북한은 인건비 대비 높은 생산성을 확보하고 있고 자원이 풍부하며 물류 허브 역할을 할 수 있는 지정학적 이점을 갖추고 있어서 이를 겨냥해 뛰어들 중국에 자칫 주도권을 내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비핵화 합의가 이뤄질 경우 과거 ‘원조’ 형태의 지원이 아닌 대규모 인프라 투자가 이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북한도 단순 지원이 아닌 투자를 통한 경제개발을 원하고 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4·27 남북정상회담에서 베트남식 개혁·개방에 큰 관심을 보인 것으로 전해졌다. 최근에는 중국에 대규모 시찰단을 파견에 경제현장을 둘러보게 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지난달 31일 열린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남북 경제협력이 본격화될 경우에 대비해 한반도 신(新)경제지도를 뒷받침하기 위한 역할과 준비에 대해서도 미리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주문했다. 지난달 8일 전국경제인연합회 주최 세미나에서 엄치성 전경련 국제협력실장은 “향후 1~2년 내 순조롭게 남북 경제통합이 진행될 경우, 이후 5년 동안 연평균 0.81% 포인트의 추가적 경제성장과 10만개 이상의 새로운 일자리 창출이 가능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