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연한 갑질’… 길거리에 ‘사직서’가 붙은 이유

입력 2018-06-04 15:42 수정 2018-06-04 15:58

“본인은 사장님의 휴대전화 배터리 충전이 끝났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충전기 선을 분리하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사장님의 입에서 험한 욕설이 나오게 만들었고 회사의 소중한 자원을 낭비하였다는 이유로 사직을 권고받았습니다.”

길거리에 ‘사직서’가 붙었다. 최근 한진 일가의 상식 밖 갑질이 국민적 공분을 불러오면서 ‘직장 내 갑질’이 화두로 떠올랐다.

믿기지 않는 갑질 행태를 바라보는 시민들의 반응은 놀라웠다. 대다수가 “나도 겪어봤다”면서 ‘동질감’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들은 “다들 이렇게 버티겠지”식으로 자위하며 꾹 눌러 참던 것으로 보인다.

‘을’의 반란이 시작됐다. 서서히 이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직장 내 갑질’로 전국이 들썩이는 와중, 도심 곳곳에 ‘사직서 포스터’가 붙었다.


“본인은 기업의 이미지와 맞지 않는 흰머리로 인해 사장님께 혐오감을 드렸습니다. 여러 차례 염색을 하고 검사를 받았지만 점차 흰머리가 다시 보이게 되었습니다. 이후 흰머리가 기업의 이미지 수준에 미달한다는 이유로 사직을 권고 받았습니다.”

지난달 18일 서울 홍대와 공덕역 일대에 조금 이상한 종이가 붙었다. 각종 갑질 피해자를 무상으로 돕기 위해 설립된 ‘사단법인 벗’에서 진행한 이벤트라고 했다.

포스터는 사직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손 글씨로 권고 사직을 당한 이유가 상세하게 적혀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믿을 수 없는 사유들. 그러나 “말도 안 된다”고 지적하는 이들은 없었다. 다들 “그럴싸 하다”고 입을 모았다.


“본인은 사장님께서 친딸처럼 아껴주시고 조언해주시는 마음을 알지 못하고 체중감량을 하지 않았습니다. 체중감량을 하지 않으면 회사에 남을 수 없다고 사장님께서 여러번에 걸쳐 말씀도 해주셨지만 체중감량을 하지 못했고, 회사의 품위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사직을 권고받았습니다.”

취업 포털사이트 잡코리아에 따르면 실제로 알바생 10명 중 4명은 외모 때문에 알바 구직에 차별을 받은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알바 근무 중 외모 지적을 받은 경험이 있는 알바생도 35.6%를 차지했다.

사단법인 벗 관계자는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갑질 형태를 이슈화하고, 피해자들이 연락할 곳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기획했다”면서 “온·오프라인 상에서 많은 호응을 받고 있다”고 밝혔다.


사단법인 벗에 따르면 갑질의 행태와 빈도는 증가하고 있지만 을을 보호하는 전문기관의 수는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지난해 말 기준 1만3933개에 달하는 비영리기관이 있기는 하지만 ‘갑질 해결’에 중점을 둔 공익기관은 거의 없다. 이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16년 4월 사단법인 벗이 설립됐다.

사단법인 벗 관계자는 “앞으로도 상식 통하지 않는 갑질로 인해 고통 받는 많은 분들을 모집하고 돕기 위해 다양한 캠페인을 계속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진=사단법인 벗 제공

박민지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