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 피해자들이 무고 혐의로 역고소되더라도 성범죄 사건 수사가 끝날 때까지는 무고 혐의 관련 수사에 착수하지 않는다. 성범죄 피해자들이 무고나 명예훼손을 두려워해 정작 자신이 당한 피해사실을 외부로 알리지 못하는 상황을 막기 위한 조치다. 법무부는 대검찰청이 이런 내용을 담은 성폭력 수사매뉴얼 개정안을 지난 11일 전국 59개 검찰청에 배포했다고 28일 밝혔다.
◇“2차 피해 두려워하는 피해자 보호방안 마련”
이번 개정안은 지난 3월 법무부 성희롱·성범죄 대책위원회의 ‘성폭력범죄 피해자에 대한 2차 피해 방지’ 권고안에 따른 것이다. 당시 대책위는 “서지현 검사의 ‘미투(#MeToo·나도 당했다)’ 폭로 이후 전국적인 미투운동으로 성범죄 피해자들이 피해사실을 용기있게 말하기 시작했음에도 가해자들이 법을 악용해 자신을 무고나 사실 적시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는 경우 그 과정에서 2차 피해를 입고 신고를 주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책위는 이어 성범죄 피해자들이 가해자로부터 무고로 고소되는 경우 ‘성폭력사건 수사종료시까지’ 무고에 대한 수사 중단을 포함한 엄격한 수사지침을 마련할 것, 사실 적시 명예훼손 수사시 공익 목적의 위법성 조각사유를 확대 적용하고 기소유예 처분을 적극 검토하는 등 피해자 보호방안도 마련하라고 권고했다.
대검은 대책위의 권고를 적극 수용했다. 대검은 개정된 수사매뉴얼을 배포하면서 성폭력 피해사실 공개 이후 피해자가 가해자로부터 사실적시 명예훼손으로 역고소될 경우 ‘위법성 조각사유’로 볼 수 있는지를 적극 검토하라는 지시도 함께 내렸다. 법을 위반했더라도 공익적 목적이 커 처벌대상에서 배제할 수 있는지를 면밀히 살피라는 의미다.
◇‘양예원 무고 논란’에도 영향 주나
법무부와 검찰의 이런 방침이 유명 유튜버 양예원씨의 폭로 이후 촉발된 논란에도 영향을 줄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앞서 양씨는 지난 17일 SNS와 유튜브를 통해 3년전 스튜디오 비공개 촬영회에서 모델로 촬영하던 도중 감금 상태에서 상습 성추행을 당했으며, 촬영된 사진이 최근 유출됐다고 주장해 사회적 공분을 일으켰다.
하지만 최근 한 매체가 스튜디오 실장과 양씨가 3년 전 나눈 카카오톡 대화 내용을 공개하면서 사건이 새 국면을 맞게 됐다. 보도에 따르면 두 사람은 2015년 7월 5일 처음 연락을 했다. 양씨가 모델 모집 공고를 본 뒤 실장에게 먼저 연락했다. 7월 10일 첫 촬영 약속을 한 뒤 9월 18일까지 총 13번 약속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
양씨가 먼저 촬영 약속을 잡아달라고 요청한 내용이 확인되기도 했다. 양씨는 7월 27일 “이번 주에 일할 거 없을까요?”라고 먼저 연락했고 “화 수 목 된다”고도 했다. 하지만 약 30분 뒤에는 “죄송합니다. 저 그냥 안할게요. 사실은 정말 돈 때문에 한 건데 그냥 돈 좀 없으면 어때요. 그냥 안 할게요. 갑자기 말씀드려서 죄송합니다. 서약서는 잘 챙겨주셨으면 좋겠어요”라고 취소 의사를 밝혔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당초 감금당한 채 강압적으로 촬영했다는 양씨 주장이 거짓이며, 양씨를 무고죄로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이 확산됐다. 스튜디오 실장 측도 카카오톡 메시지를 근거로 합의에 의한 촬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번 사건과 관련해 양씨에 대한 고소가 진행된 것은 아직 없다. 설령 양씨에게 무고 혐의가 있다고 하더라도 개정 매뉴얼상 성범죄 피해의 전모를 밝혀내는 게 최우선이다. 대책위가 피해자의 명예훼손 혐의에 대해서도 공익성 여부를 최대한 따져 피해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권고한만큼 법적으로 처벌될 가능성은 낮다.
문제는 양씨 등 성범죄 피해자에 대한 비난 여론이다. 수사기관과 여성단체에서는 ‘피해자 중심주의’를 통해 성범죄 피해자를 최우선으로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온라인에서는 일부 피해여성들이 ‘미투’를 악용해 의미를 변질시키고 있다며 강력한 처벌을 주장하고 있다.
‘2차 가해’ 논란에도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무고죄 특별법(양예원법) 제정을 촉구합니다’ 라는 글이 올라와 나흘 만에 약 11만명의 동의를 얻었다.
청원글 작성자는 “미투운동을 그저 돈을 얻어내기 위한 수단, 미투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힘을 입어 무죄한 사람을 매장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다”며 “죄없는 남성이 고소당하면 억울하게 유죄판결이 날 경우 5~10년의 실형을 선고받지만 무고죄로 고소당한 여성은 그저 집행유예가 나올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민사상으로는 허위 고소로 인한 피해 전액을 배상하고, 형사상으로는 무고죄 형량을 살인·강간죄 수준으로 증가시켜 주시길 부탁드린다”고 썼다.
하지만 양씨가 폭로한 성범죄의 전모가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양씨의 이름을 딴 법을 제정해 처벌하라는 여론이 들끓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경찰 관계자가 직접 SNS를 통해 “피의자가 여론전하느라 뿌린 것을 언론이 그대로 보도했다”며 심각한 2차 피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백상진 기자 shark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