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부인 이명희씨는 두 딸에 이어 서게 된 포토라인에서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고 첫 마디를 꺼냈다. 불과 나흘 전 수사 기관에 소환된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과 같은 답변이었다. 폭행 혐의를 받았던 조현민 전 전무는 어머니와 언니의 사과문에서 ‘물의’만 ‘심려’로 바꿔 말했다. 입을 맞춘 듯 매우 흡사한 내용의 사죄였다.
이씨는 28일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에 출석해 첫 피의자 조사를 받았다. 지난 6일 폭행 및 업무방해 혐의로 입건된 바 있다. 이씨는 “상습적으로 폭행한 사실이 있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게 생각한다”고 답했다. “가위나 화분 던진 것 맞냐” “상습 폭행 인정하냐”는 물음에도 “죄송하다”고만 했다. 1분30초 남짓한 시간 동안 이씨가 사용한 문장은 “죄송하다” “성실히 조사 받고 말하겠다” “(피해자 회유 시도한 적) 없다”까지 모두 3개였다. 취재진 질문은 13개였다.
조 전 부사장은 필리핀 가정부 불법 고용 혐의를 받아 지난 24일 법무부 산하 서울 출입국외국인청에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했다. 기내 땅콩 서비스를 문제 삼아 비행기를 돌렸던 2015년 이후 다시 포토라인에 섰다. 조 전 부사장도 이씨처럼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로 사과를 시작했다. ‘땅콩 회항’ 사건 때는 “심려를 끼쳐 진심으로 사과 드린다”가 첫 마디였다. 혐의는 달랐지만 용서를 구하는 방식은 비슷했다. 곤란한 질문에는 애매하게 답변했고, 더 곤란한 물음에는 침묵했다.
이달 1일 경찰 소환 조사를 받은 막내 조 전 전무는 3년 전 언니를 흉내냈다. 이씨와 마찬가지로 폭행 및 업무방해 혐의를 받은 조 전 전무는 “심려를 끼쳐 진심으로 죄송하다”고 여섯 차례 반복해 말했다. 취재진 질문은 “유리컵과 음료를 뿌린 것 인정하냐” “총수 일가 사퇴론까지 나오는 것 어떻게 생각하냐” 등 한진가 모녀의 갑질 의혹에 대한 입장을 묻는 내용이었지만 조 전 전무는 “죄송하다”라는 말로 답을 대신했다.
‘물의를 빚어 죄송하다’는 유명 기업인이나 연예인이 구설에 올랐을 때 단골로 등장하는 사죄멘트다. ‘심려를 끼쳐’도 마찬가지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물의’를 ‘어떤 사람 또는 단체의 처사에 대해 많은 사람이 논평하는 상태’라고 규정하고 있다. ‘심려’는 ‘마음 속으로 걱정함. 또는 그런 걱정’이라는 뜻이다. 자신의 잘못을 은근히 부인하면서도 사려 깊어 보이는 태도를 취하는 기술적인 언사다. 맛칼럼리스트 황교익씨는 조 전 전무 사과를 두고 “이번 일로 그를 걱정하는 사람은 그의 집안 사람 뿐일 것. 국민은 화가 나 있지 걱정 안 한다”고 지적했다.
심지어 세 모녀의 사죄는 서로를 베낀 수준이었다. 내용은 물론이고, 방식까지 비슷했다. “죄송하다”와 “성실히 조사에 임하겠다”는 문장을 적절히 사용해 자신에게 불리한 질문은 회피했다. 그 외 답변은 일절 하지 않았다.
경찰은 이씨에게 상해 혐의 적용을 검토하고 있다. 상해죄가 적용되면 피해자의 의사와 관계없이 처벌 대상이 된다. 이씨는 자신의 전 운전기사와 하얏트 호텔 공사장 직원에게 폭언과 폭행을 한 혐의를 받고 있다. 광고 대행사 직원에게 물컵을 던진 의혹을 받았던 조 전 전무는 피해자와 합의해 폭행 혐의를 벗었다. 조 전 부사장은 가사 도우미 불법 고용 의혹에 이어 국외 물품을 밀반입한 혐의를 받고 있다.
박은주 기자 wn1247@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