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끝 전술’은 북한의 오랜 전유물이었다. 북핵을 비롯한 여러 외교 상황에서 대결이든 협상이든 막다른 상황까지 몰고 가는 초강수를 꺼내 들곤 했다.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도 북한은 “미국이 일방적인 핵 포기를 강요하기 위해 우리를 코너로 몰아가려 한다면 수뇌상봉에 대해 재고할 수 있다”고 강수를 뒀다.
이런 전술을 이번에는 미국이 차용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다음달 12일로 예정돼 있는 북·미 정상회담을 ‘공개서한’이란 형식으로 전격 취소했다. 북한보다 한 술 더 떠 회담 무산도 감수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밝혔다. 미국 언론과 정치권에선 그동안 트럼프 대통령의 협상 스타일을 ‘미치광이 이론’에 빗대 해석했다. 미국식 ‘벼랑 끝 전술’인 셈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24일(현지시간) 공개한 서한에서 “당신(김 위원장)과 만나길 굉장히 기대하고 있었다”면서 “북한이 가장 최근 발표한 성명에 담긴 극도의 분노와 공개적인 적대감으로 인해 지금 회담을 개최하는 건 부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전날 북·미 정상회담 개최 여부를 “다음 주에 알게 될 것”이라고 밝힌 것과 달리 불과 하루 만에 전격적인 취소 통보를 했다. 다만 “정상회담에 대해 마음이 바뀐다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전화나 이메일을 주길 바란다”고 덧붙이며 여지를 남겼다.
북한은 트럼프 대통령의 서한이 공개된 지 약 9시간 만에 “우리는 아무 때나 어떤 방식으로든 마주앉아 문제를 풀어나갈 용의가 있다”고 반응했다. 북한이 더 강경하게 나올 것이라는 예상도 있었으나 빗나갔다. 오히려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우호적 제스처를 보이며 북·미 정상회담을 이대로 무산시키고 싶지 않다는 속내를 드러냈다.
북한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은 ‘위임에 따라’ 발표한 담화에서 “돌연 일방적으로 회담 취소를 발표한 것은 우리로서는 뜻밖의 일이며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위임에 따라’라는 문구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직접적인 뜻이 담겼음을 의미한다. 그러면서 “조선반도와 인류의 평화와 안정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하려는 우리의 목표와 의지에는 변함이 없으며 우리는 항상 대범하고 열린 마음으로 미국측에 시간과 기회를 줄 용의가 있다”고 덧붙였다.
담화는 미국의 취소 통보에 대해 “인류 염원에 부합되지 않는 결정”이라며 비판하는 형식이었지만, 북·미 정상회담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미국을 ‘달래는’ 듯한 내용이 주를 이뤘다. 김 제1부상은 “벌어진 불미스러운 사태는 역사적 뿌리가 깊은 조·미(북·미) 적대관계의 현 실태가 얼마나 엄중하며 관계개선을 위한 수뇌상봉이 얼마나 절실히 필요한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례적으로 북·미 정상회담을 준비하며 가졌던 기대를 내비치기도 했다. 김 제1부상은 “트럼프 방식이라고 하는 것이 쌍방의 우려를 다 같이 해소하고 우리의 요구 조건에도 부합되며 문제해결의 실질적 작용을 하는 현명한 방안이 되기를 은근히 기대하기도 했다”며 “우리 국무위원회 위원장께서도 트럼프 대통령과 만나면 좋은 시작을 뗄 수 있을 것이라고 하시면서 그를 위한 준비에 모든 노력을 기울여 오시였다”고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서는 미국의 과거 대통령들과 비교해 치켜세웠다. 김 제1부상은 “우리는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시기 그 어느 대통령도 내리지 못한 용단을 내리고 수뇌상봉이라는 중대 사변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데 대해 의연 내심 높이 평가해왔다”고 말했다.
북한이 북·미 정상회담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사실상 트럼프 대통령의 ‘재고’를 요청함으로써 두 정상의 만남이 무산위기에서 되살아날 가능성이 제기된다. 북·미 정상회담을 위한 물밑 협상의 미국 측 최전선에 있던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북한의 담화 이후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통화하며 “북·미 간 대화 여건을 조성하도록 노력하자”고 했다.
외교부는 폼페이오 장관이 “미국도 북한과의 대화 지속에 대한 분명한 의지가 있다”고 강조했다고 전했다. 꺼져가던 북미정상회담 불씨를 다시 지필 수 있음을 밝혔다는 것이다. 만약 북·미 정상회담이 ‘취소 국면’을 극복하고 성사된다면 트럼프의 대표적인 벼랑 끝 전술 성공사례가 될 수 있다.
권중혁 기자 gre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