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화 시대에 맞춰 육체노동자 정년을 60세가 아닌 65세로 봐야 한다는 법원 판결이 또 나왔다. 최근 하급심에선 ‘65세 정년’의 타당성을 인정하는 판결이 잇따르고 있다. 일본 기업들은 이미 정년을 60세에서 65세로 속속 연장하고 나섰다.
22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민사항소7부(부장판사 김은성)는 교통사고 피해자 A씨와 그 가족이 전국버스운송사업조합연합회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항소심에서 1심보다 280여만원 많은 배상금을 지불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A씨의 가동연한은 65세로 보고 일실수입을 산정해야 한다"고 봤다. 가동연한은 노동력이 있는 나이를 뜻한다. 사망 또는 장애로 잃는 수입(일실수입)을 산정할 때 기준이 된다. 그동안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 등에 의해 육체노동자의 가동연한을 60세로 판시해온 법원에서부터 ‘정년 연장’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재판부는 "가동연한을 55세로 본 판례가 형성된 1950년대 평균수명은 남성 51.1세, 여성 53.7세였지만 2010년 기준으로 평균수명은 남성 77.2세, 여성 84세에 이르렀고 향후 비약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추정된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이어 "철도원, 토목원 등 육체노동을 주된 업무로 하는 기능직 공무원의 정년도 과거 58세에서 현재는 60세로 늘어났다"며 "노령연금 지급 개시 연령도 60세였지만 현재 기초연금 수급 시기는 65세로 변경됐다"고 부연했다.
재판부는 "가동연한을 60세로 인정한 1990년 전후와 많은 부분이 달라지고 있다. 기존 입장을 고수한다면 경비업무 종사자 상당수가 60세 이상이고 공사현장에서도 60대 이상 인부를 흔히 볼 수 있는 현실과 괴리가 있다"고 봤다. A씨는 교통사고로 비장 파열, 늑골 골절 등 상해를 입은 터였다. 1심은 사고 당시 29세였던 A씨가 60세까지 노동 능력이 있다고 판단했고 이에 따라 일실수입, 치료비, 위자료 등 2079여만원을 배상하라고 판단했다.
이처럼 노동 능력이 65세까지 인정된다고 본 판결은 앞서도 있었다. 수원지방법원 민사5부(부장판사 이종광)는 2017년 12월 교통사고 피해자 B씨가 손해보험사를 상대로 제기한 민사소송 항소심에서 "보험사가 B씨에게 1심보다 늘어난 694여만원을 지급하라"고 판단했다. 역시 가동연한을 60세에서 65세로 확대 적용한 결과였다.
이 재판부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로 확입된 기존 가동연한에 관한 경험칙은 변경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보험사가 상고하지 않아 수원지법 항소심 판결은 확정됐다. 법원 관계자는 "A씨 사건은 상고해서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나온다면 새로운 판례가 정립돼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이고, 상고하지 않더라도 하급심의 판결들이 축적된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판결"이라고 말했다.
◆ 일본 기업들은 이미 60→65세 정년 연장
극심한 인력난을 겪고 있는 일본 기업들은 정년을 60세에서 65세로 연장하면서 고령 직원의 급여도 기존보다 대폭 인상하고 있다. 가파르던 ‘60세 급여 절벽’이 완만해지며 ‘65세 정년’ 시대가 자리를 잡아가는 중이다. 기업들은 경험 많은 고령 직원을 붙잡아두면서 이들의 사기도 떨어지지 않게 해 생산성을 유지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일본의 대형 보험사인 메이지야스다생명보험은 내년 4월부터 정년을 65세로 늘리면서 60세 이상 직원의 급여를 60세 이전의 70∼80% 수준으로 유지키로 했다. 60세가 넘으면 원래 받던 것보다 덜 받는다는 얘기지만 기존 제도와 비교하면 상당한 차이가 있다.
현행 고연령자 고용안정법에 따르면 기업은 60세 정년 후에도 일하고 싶어하는 직원을 65세까지 고용해야 하는데, 대부분 기업은 정년 전의 절반 정도만 주는 촉탁사원으로 재고용했다. 촉탁사원은 업무도 관리직을 보좌하는 일로 제한된다. 재고용 대신 정년 연장을 택한 메이지야스다생명에선 60세 이상이 경영관리직이나 지점장도 맡을 수 있게 된다. 고령자가 중요 직책을 맡을 경우 급여가 오히려 50대 시절보다 많은 사례도 나올 전망이다.
이 회사는 거품경제기에 대거 채용했던 사원들의 퇴직으로 향후 20년간 사무직의 20%에 달하는 1700명의 노동력을 잃게 될 것으로 추산했다. 이번 정년 연장으로 700명 정도를 확보할 전망이다. 인건비가 일시적으로 늘어나겠지만 회사는 생산성 향상으로 비용 증가분이 상쇄될 것으로 보고 있다.
기업이 촉탁으로 재고용하지 않고 정년을 늘리는 것은 재고용 직원이 처우에 실망해 동기부여가 잘 안 되기 때문이다. 자동차 업체 혼다도 “60세가 넘어서도 일할 의욕을 높여주자”며 지난해 4월 사원 4만명을 대상으로 정년을 연장했다. 60세 이상의 급여는 50%(기존 촉탁)에서 80%로 높아졌다.
사무용 가구 제조업체 오카무라제작소는 다음 달부터 정년을 65세로 늘린다. 60세 이상의 급여는 75% 수준으로 하고 나머지 근로조건은 바꾸지 않기로 했다. 도큐부동산홀딩스그룹 계열사인 도큐커뮤니티는 지난달 정년 연장 대상자를 확대했다. 이 회사 인사담당자는 “인재 유출을 막기 위해 급여수준을 개선했다”고 밝혔다.
일본 총무성에 따르면 지난해 일본의 25∼44세 노동력 인구는 2016년 대비 43만명 감소했다. 저출산으로 젊은층 노동력 확보가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에 정년 연장으로 시니어를 확보하려는 기업이 계속 늘어날 것 같다고 니혼게이자이는 전했다.
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