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세은의 씨네-레마] 별을 바라보는 사람들

입력 2018-05-18 14:43
원더스트럭(Wonderstruck, 2017)

‘시궁창 속에서도 우리 중 누군가는 별을 본다.’ 1977년, 소년 ‘벤’은 엄마가 벽에 붙여 놓은 이 명언의 의미를 묻는다. 오스카 와일드의 인용문이다. 하지만 엄마는 “너는 뭐라고 생각하니”라고 되묻기만 했고 얼마 후 그를 남겨두고 세상을 떠난다. 더구나 갑작스런 사고로 청각 장애를 갖게 된 소년은 엄마가 남긴 말씀을 따라 고향을 떠나 뉴욕으로 여행을 시작한다. 소년이 갖고 있는 단서는 ‘원더스트럭’이라는 책과 그 안에 있던 편지다. 소년은 편지의 주인공이 아버지라고 확신한다.


태어날 때부터 소리를 듣지 못하는 소녀 ‘로즈’는 아버지의 엄격한 통제 속에 살고 있다. 소녀는 모형 만들기를 좋아하고 은막의 스타를 동경한다. 그녀가 태어난 1927년은 영화가 무성에서 유성으로 전환한 기념비적 해였다. 농아인으로 평범한 사람들과 다름없이 영화를 즐겼던 소녀는 갑작스런 변화에 당황한다. 더구나 농아인의 세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아버지가 가정교사를 데려오던 날, 소녀는 집을 떠나 동경하는 여배우 릴리언 메이휴를 찾아 뉴욕으로 여행을 시작한다. 소녀는 은막의 스타가 어머니라고 확신한다.

토드 헤인즈 감독의 ‘원더스트럭’은 1927년과 1977년을 배경으로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를 교차시킨다. 이들은 뉴욕의 ‘자연사 박물관’에서 시대를 뛰어넘어 조우한다. 자연과 인류가 남긴 오랜 시간의 증거물들이 있는 공간에서 자연의 신비를 보며 이들은 경이로움을 느낀다. 인류의 역사와 과학 안에서 각자의 꿈을 발견한다. 소녀는 오빠를 만나 청각 장애 교육을 받기 시작했고 후에 박물관에서 모형 만드는 일을 하게 된다. 소년은 ‘원더스트럭’의 실제 장소와 아빠의 가족을 찾게 된다.

이 영화는 섬세하게 재현한 1920년대와 1970년대의 뉴욕의 풍경을 보는 즐거운 체험을 선사한다. 특히 1927년 극장에서 로즈가 보는 무성영화는 초기 영화사의 거장 DW 그리피스의 ‘폭풍 속의 고아들’(1921), 빅토르 시외스트롬의 ‘바람’(1928)의 몇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이 두 편의 영화에는 무성영화 시대의 최고의 스타 릴리언 기쉬가 출연한다. 헤인즈 감독은 영화의 제목과 장면, 배우의 이름을 살짝 바꿔 옮겨 놨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 주는 놀라움은 농아인들이 겪는 삶을 영화적 경험으로 옮겼다는 점이다. 로즈가 사는 1927년은 시각적 체험을 강조한 흑백 무성영화처럼 재현했다. 로즈 역은 실제 농아인 배우가 연기했다. 1977년 갑자기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 소년의 경험 역시 관객이 느낄 수 있는 영화적 경험으로 담았다.

영화 '원더스트럭'(Wonderstruck, 2017)

영화 마지막 장면의 배경은 역사상 최악의 정전사태로 기록된 1977년 7월 13일 미국 뉴욕의 밤풍경이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 종전 이후 극심한 경제 악화 속에 있었고 이 때문에 어둠에 잠긴 하룻밤 사이에 수천 건의 약탈과 폭력, 화재가 속출한 밤으로 기록된 날이다. 세계 최고의 문명도시에서 벌어진 온갖 잔혹한 범죄는 뭇사람을 충격에 빠지게 했다. 여러 사건과 충격을 겪으며 드디어 서로 만나게 된 세 사람은 또 다른 격변의 밤을 맞이한다. 세상이 어둠에 잠기고 두려움과 불안에 떨 때 이들은 하늘의 별을 바라본다.

임세은 영화평론가

하나님은 말씀을 따라 고향을 떠나 이방인으로 힘든 여정을 하던 아브라함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5)라고 말씀하셨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던 아브라함은 그렇게 믿음의 조상이 됐다.(로 4:18) 소년은 벼락을 맞아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됐지만, 그것은 ‘경이로운 충격(원더스트럭)’의 시작이었고 소년의 악몽은 악몽이 아니었다. 최악의 순간에도 별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이 영화는 격변을 겪고 그것을 넘어서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임세은 영화평론가